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꼬 용미 Sep 10. 2024

미국에서 내 영어 공부는?

영어보다 관계!

같은 아파트에 사는 피아노 선생님이 나를 초대했다. 칼국수를 대접받았다. 우리는 처음 만났지만, 아줌마 특유의 수다, 타국에서 느끼는 동포 간의 흐르는 전기? 동질감?으로 금방 친해졌다.


피아노 선생님의 미국 이름은 안나(가명)다.  안나 언니는 미국교회에서 반주자로 일하고 있었다. 교회에서 매주 목요일에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수업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초급, 중급, 고급. 세 반이 있었다. 나는 초급반에 들어갔다. 금발의 베티선생님과 칠레 출신의 보조 선생님 빅터가 있었다.  

 

 “Hello, Nice to meet you. 음... I am Yongmi. I’m from Korea. I'm married. I have three sons.

 I am a housewife. 음....”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음.. 저는 용미입니다. 한국에서 왔어요. 결혼했고 아들이 셋이고 주부입니다. 음...)

    

첫 시간에 나를 소개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베티가 물었다.


 “Why did you come to U.S.A?”

 “음..... My husband wants to study more. 음....”     


(너는 미국에 왜 왔니?

음... 남편이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해서요. 음..)


남편의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왔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애를 먹었다. 학사(bachelor‘s degree), 석사(Master’s degree), 박사(doctor's degree)가 영어로 무엇인지 몰랐다. 당시 내 폰은 스마트폰이 아니었다. 아니 5년 동안 쭉 스마트폰이 아니었다. 미국은 전화를 받는데도 요금이 나갔다. 거의 남편과 전화를 하는 용도였기 때문에 휴대폰에 돈을 쓸 필요는 없었다.


초급반에는 65세가 넘은 한국인 할아버지가 계셨다. 책에 줄을 긋고 메모를 해가며 열심히 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미국에서 오래 살았다는 할아버지는 베티와 말은 잘 통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자꾸 물어본다. 나도 잘 들리지 않는 영어를 할아버지께 가르쳐 주느라 진땀을 뺐다.


읽기는 그럭저럭 되었다. 읽고 나서 해석도 되었다. 하지만 듣기와 말하기가 꽝이었다. 생각이 말이 되어 나오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이미 지나간 것을 생각하느라 또 베티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영어를 배우고 싶어 용기를 내어 나왔지만, 낯설어서 꽁꽁 얼어 있었던 것 같다. 


궁금하거나 모르는 단어에 대해 물어볼 수 있는 숫기와 용기가 없었다. 한국에서도 아니 지금도 여러 사람 앞에서 물어보거나 주문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 타입이다.  그래도 정기적으로 베티와 빅터 그리고 중국인 친구, 프랑스 친구 등과 더듬더듬 대화를 이어갔다.


베티는 자녀의 마약문제와 세 번의 암 투병으로 힘들었을 때,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가장 힘들었던 시간들을 슬기롭게 보내고 노년에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금발에서 백발이 되어가고 있는 베티는 메이저리그를 아주 좋아했다. 시즌권을 끊고 다닐 정도였다. 내가 운전면허가 없을 때, 베티는 우리 아파트까지 와서 나를 매주 교회로 데리고 가 주었다.  그 차 안에서 단둘이 대화하던  짧은 시간이 참 좋았다.


사람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랐다.  내가 가장 어려웠던 것은 small talk였다. 인사를 하고 날씨를 묻고 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남편은 스몰 토크가 가장 쉬운 거라고 나를 이해 못 했지만, 나는 당면한 걱정거리나 내면의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다. 마음을 나누고 싶었던 거다.


어느 날, 스쿨버스 스탑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늘 보던 얼굴이 아닌 뉴페이스가 보였다. 그냥 눈이 마주쳐서 "Hi~" 했다. 그가 내게 다가와 열변을 토했다. (갑자기? 응. 갑자기.)


 "My wife is cheating on me!"

 "Really?"

그날따라 스쿨버스가 늦게 오고 남자의 한탄은 길어진다. 남미 출신의 남자는 얼마나 속상했으면 처음 만난 내게 하소연을 할까 싶은 게 짠하고 찡했다. 둘 다 서툰 영어로 한참을 이야기했다. 이럴 때는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법이다. 다 알아먹었다. 난 이런 대화가 하고 싶었던 거다.


막장 스토리가 흥미로운 것이었을까? 나도 속상한 걸 하나 정도 털어놓았다면 우린 친구가 되었을까?

  

아파트에 새로 이사 온 S부부를 교회 ESL수업에 데려갔다. 남자는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박사 후 과정으로 메릴랜드 대학교에 왔다. 일상적인 회화를 하고 싶다고 해서 ESL수업에 데려갔고 중급반으로 갔다.

     

S의 갑작스러운 권유로 나도 중급반으로 올라갔다. 중급반에서 쉐럴 선생님을 만났다. 쉐럴은 아프리카계 인종(흑인)이었다. 시원시원한 목소리에 거침없는 입담으로 수업을 주도했다. 게다가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주 저녁에 자원봉사를 하러 나온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이 따뜻했고 절실해 보이기까지 했다.    

  

쉐럴이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면 우리가 대답했다. 문장이 꼬이거나 틀린 부분을 쉐럴이 바로 잡아 주었다. 교재 없이 듣고 말하는 수업은 내게 쉽지 않았다. 내가 데려간 지인 S가 질문을 해석해 주기도 했지만, 잘 아는 한국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이 영어로 말하기가 더 어려웠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한다.   

   

나는 자연스럽게 안나 언니랑 미국 교회를 다녔다. 영어 한마디라도 듣고 공부를 해보고 싶은 욕심에서다. 목사님의 긴 설교 중에 중요한 메시지나 몇 문장 정도 알아 들었다. 들으면 좋고 힘이 나는 이야기였다. 남편이 일요일에 아이들을 봐줘서 가능했다. 운전하고부터는 아이들도 데리고 갔다.


 ‘WOMEN'S CONNECTION(수요일 성경공부 모임)’에도 나갔다. 성경구절을 읽고 보조교재 문제를 풀어 와 발표하는 모임이었다. 영어로 발표나 기도는 어려웠다. 늘 나는 스킵하고 멤버들의 근황을 묻고 살아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가 떨리고 손도 덜덜 떨리지만 혼자 운전을 해서 기어코 참석하는 92세의 중국인 할머니(의사로 은퇴하심), 안내견과 함께 오던 시각장애인 할머니가 아직도 생각난다. ESL 초급반 선생님 베티와 고급반 선생님 아니타, 보조 선생님 빅터의 아내(캄보디아 출신)도 참석했다. 늘 방이 꽉 찼다.   


오전 10시 모임이고 여자들의 모임이라 Potluck은 기본이었다. 미국 사람들의 음식을 매주 먹어 보는 경험이 좋았다. 나는 믹스커피, 김밥, 김치 부침개 등을 만들어 갔고 안나 언니는 한국 과자와 음료를 챙겨갔다.  

   

사실, 미국교회와 성경공부 모음은 영어공부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성경도 어렵고 영어도 어려운데, 성경공부라니...... 젯밥에 더 관심이 있었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좋았고 Potluck 음식이 좋았고 가끔 미국 교인의 집에 가보는 것이 좋았다.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던 거다.    

  

한 번은 부부싸움을 하고 교회에 갔다. 예배가 끝나고 우울해하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목사님이 말했다.

“How are you doing? Yongmi, are you Okay?”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제대로 말도 못 하고 훌쩍거리며 단어 몇 개만 내뱉었다. 하지만, 목사님은 다 알겠다면서 나를 토닥여 주었다. 딱딱하게 굳은 내 마음이 말랑말랑하게 풀렸다.   


그러나, 나는 미국 교회를 떠났다.


미국교회는 여름방학을 맞아 주위의 많은 아이들을 초대해 행사를 열었다. 우리 아이들까지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규칙들을 배우면서 신나게 게임을 하고 오전 내내 신나게 놀았다.  집에 가려는 나를 붙잡고 아니타가 묻는다.


"Yongmi, do you know where the bag is?"

"I don't know. What is that?"

"How about your children?"


(용미, 그 가방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몰라요. 그게 뭐 죠?

너희 아이들도 모를까?)


대답도 없이 아니타는 우리 아이들을 바라봤다. '착각을 했을 테지' 싶었지만, 주차장까지 따라와 재차 묻는다. 의심의 눈초리로....  


정확히 무엇인지 아직도 모른다. 뭔가 없어졌고 우리 아이들이 의심을 받았다. 며칠을 혼자 끙끙 앓았다. 속상했다. 억울했다. 의심을 받은 것보다 내가 제대로 항변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더 아팠다. 그리고 조용히 미국 교회를 떠났다.


베티에게도, 안나 언니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종교가 없던 남편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영어도 배우고 나의 유일한 사회생활이라고 투쟁하듯 나갔던 교회였기 때문이다.


끝내 영어의 한계는 극복하지 못했다. 미국교회를 3년이나 다녔지만, 소극적인 성격 탓에 제대로 된 친구하나 만들지 못했다. 안나 언니가 이사를 가자 더 이상 나를 연결해 줄 끈을 찾지 못했다. 영어와 운전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람들과의 친화력이 중요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8층 동생이 다니던 한국교회로 옮겼다. 남편은 신앙이 없었지만, 한국 사람들과 정을 나누자고 꼬셔 함께 한국교회를 다녔다. 그렇게 2년을 한국 교회에 다녔다. 하지만 비슷했다. 영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람들에게 선뜻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소중함을 몰랐던 걸까. MBTI 검사에서 난 'I'라는 것을 알고 조금 이해가 되었다. 그것이 '나'라는 사실을 부끄럽지만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때는 정말 몰랐다. 사람사이의 관계도 물을 주고 정성을 쏟고 적극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나'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미국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언니, 동생, 친구, 이웃, 아들 친구 맘,  학교 선생님, 교회 집사님, 권사님들.....  하지만, 먼저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게 가장 아쉽다. 언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 영어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 아파트 한국인 아내들을 모아 영어공부모임을 만들었다.  S가 추천한 에버노트와 팟캐스트를 이용했다. 팟캐스트의 에피소드를 하나씩 공부해 오고 공유노트에 다섯 번씩 녹음해서 올리고 본문을 통째로 외워오는 것이 숙제였다. 아이들을 재우고 새벽 3시까지 3개월을 공부했다. 이때 영어 실력은 가장 늘었다고 생각한다. 쉐럴과의 대화에서 일단 질문들이 들리기 시작했으니까. 

     

어느 날, 영어공부모임 도중에 배가 아팠다. 꾹 참고 수업을 마쳤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오른쪽 배가 점점 더 아파졌다. 수술을 했고 영어공부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남편의 박사학위 취득만 보고 달렸던 것 같다.

남편과 아이들이 온통 내 중심에 있었다.

무료 수업의 한계는 아니었을까?

영어는 잘하고 싶었지만, 공부가 하기 싫었다고 솔직히 말해야 할까?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 하나, 관계! 그리고 운전, 영어.


  


*ESL pod.com   

https://www.youtube.com/watch?v=X9Gk9CASCfQ&list=PL2mNnze-5j6bAb9GZsHFQd0CON5wcjk78&index=2

  

* 영어를 무료로 배울 수 있는 곳 -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한 리터러시 수업

   https://www.frederickliteracy.org/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