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리 집 가난해?”
하얗게 콸콸 부서지는 세면대 수도꼭지를 반쯤 잠가 물이 쫄쫄쫄 나오게 했더니, 막내가 갸우뚱거리며 묻는다. 양치할 때나 세수할 때 세차게 버려지는 물이 아까워 속도를 줄였을 뿐이다. 바쁜 아침 느리게 나오는 물을 받아 세수를 하자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나? 조금만 일찍 일어나면 될 것을, 하면서도 세면대 물을 조금 더 열어 주었다.
여름마다 단수를 경험하고 자란 나는 물 아끼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아이들은 궁색하게 느껴졌나 보다. 2층 세면대 물도 간간이 줄여 보았으나 아들들은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다. 가끔 1층 화장실을 쓰는 큰아들은 조용히 세면대 물을 활짝 열고 간다.
아마도 내가 남편에게 느끼는 궁색함이었을 것이다. 우리 집 1층은 봄, 여름, 가을에 온수가 잠겨 있다. 손이 시려 세수를 못 하겠다고 느끼는 초겨울쯤에야 약간 틀어놓아 쫄쫄거리는 온수를 만날 수 있다. 잠깐 손 씻는 사이 물이 따뜻해 질리 없으니 그냥 찬물을 쓰라는 것인데, 나는 미지근이라도 했음 하는 것이다. 산후조리를 잘못해 찬물이 손가락에 닿으면 붓고 시린 여자들의 사정을 남편은 알리 없다.
남편은 강요하지 않는다면서 몇 해 동안 내내 온수를 잠가 버렸다. 조용히 따르던 나도 지난가을부터 ‘온수 잠그지 말 것!’ 쪽지를 붙여두고 당당히 요구했다.
요즘 경기가 어렵다 보니 아끼는 것이 대세다. 서로 얼마나 아끼고 짠돌이로 사는지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우리 집은 TV 유선 케이블도 달지 않았고 넷플릭스도 없다. 수신료 2,500원만 내고 여섯 개 채널 기본 방송만 본다. 신혼 때 썼던 관리형 냉온정수기와 비데도 끊고 직접 관리하는 직수형 정수기만 놓았다. 미국에서 돌아와 초기 정착 비용을 아끼려는 결정이 그대로 쭉 이어온 것이다.
절대 남은 음식 버리지 않고 보관해 두었다 먹는다. 남편은 회식하고 남은 음식도 싸 들고 온다.
"난 엄마, 아빠처럼 살기 싫어!"
큰아들은 독립해 살면서 애* 뮤직을 듣고 스포츠를 좋아해 티*도 개별 시청한다. 휴가 때마다 헬스장 가는 것도 코스 중 하나다. 노래방 가듯 헬스장 가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문화처럼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세대가 다르니 강요는 안 한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사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질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쇼미 더 머니가 한창 유행일 때, 아이들은 유튜브를 통해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케이블이나 넷플릭스의 필요를 못 느꼈다. 그리고 TV 그만 보고 공부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컸던 게 사실이다.
하루 몇 번씩 유튜브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해야 할지,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볼 수 없어서 유튜브에 더 매달리는 것은 아닌지, 그건 좀 헷갈린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많이 아쉽긴 하다. 폭삭 속았수다도 앞부분만 제대로 봤다. 서울 언니집에서. 모임에서 흑백 요리사나 최신 드라마 이야기를 할 때, 가끔 입을 닫고 있어야 하는 것도 좀 아쉽다.
게다가 각자 유튜브를 보는 것의 문제는 가족 간에도 공통의 관심사가 없고 함께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누는 다정한 시간이 없는 것이다. SNS상으로는 공유하면서 정작 가까이 있는 가족과의 교감이 사라지는 건 많이
씁쓸하다. 그래서 넷플릭스 하나 정도는 봐줘야 화목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런데 디즈니와 웨이브 등 여러 개를 다 구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의 한계가 있어 낭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EBS와 KBS, MBC, SBS 기본 방송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은 어쩜, 나의 오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TV에서 지독하게 아끼는 재테크 남이 나왔다. 먹는 물도 안 사고 비누, 수건도 없이 살고 오래된 가전과 가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경지의 고수였다. 그 덕에 땅도 사고 아파트가 몇 채라는데, 내 입이 떡 벌어졌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가난을 유산 삼아 아끼고 절약하며 악착같이 모으는 재미로 사는 사람 같았다. 그는 그만의 철학이 투철하고 절약이 몸에 배어 진정으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게다가 하루 장동건처럼 플렉스 하는 통장도 따로 있다고 하니, 나름의 원칙과 보상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우리 아끼는 것은 그분에 비하면 새 발의 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분 옆에 있는 그녀는 행복할까?
아들이 우리 부부를 바라볼 때, 그런 의문이 들지 않았을까 싶었다.
갈팡질팡 여전히 넷플릭스 구독을 망설이고 있다. 그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둘째는 선천성 갑상선기능저하증 환자였다. 갑상선은 있는데, 호르몬이 생성되지 않는 케이스였다. 두 달마다 대학병원에 가 혈액검사를 하고 받아온 가루약을 아침마다 신생아에게 먹여야 했다. 하루 한 번 약만 먹으면 정상이라니 안심이 되었지만, 평생 짊어질 숙제 같은 것이어서 내 마음속에는 커다란 돌덩이가 들어앉은 듯했다.
임신 중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자책에 시달렸고 산후우울증이 찾아왔다. 아이를 바라보면 눈물만 났고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다는 무력감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불쌍한 아이를 안아주지 않았고 4층 아파트 베란다 창문만 바라봤다. 병원에 간다는 생각은 못 할 때였고 우울한 나날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찌릿찌릿한 감각이 느껴지며 젖이 차올랐을 때야 비로소 둘째 아이를 안아 젖을 먹였다. 땡땡해진 젖꼭지를 물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작고 해맑은 둘째는 더 예뻤다. 온몸을 내게 맡기고 전적으로 의지하며 젖을 빨아대는 아이의 미약한 힘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픈 아이를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나는 마음속으로 빌고 다짐했다. 소중한 우리 아이를 건강하게 잘 키우겠다고! 잘못했다고.
아기는 나를 위로하듯 웃고 있었다. 차차 아들의 병을 받아들였고 익숙해졌다.
그리고 둘째가 만 세 살 무렵 기적과도 같이 선천성 갑상선 기능저하에서 탈출! 했다. 기쁨의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약속했다.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든 전하겠다고. 그것은 나에게 하는 약속이고 다짐이었다.
기부!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가장인 남편이 학생이었던 긴 시간 동안, 한국으로 돌아와서 형편이 크게 달라진 게 없었던 또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의 부채를 안고 살았다.
드디어 마음의 부채를 내려놓기로 했다. 오랜 시간 어디에 기부를 전할까 고민도 했다. 국내 위기 가정지원 사업 중 자립준비청년을 후원하기로 했다. 내 뜻을 비쳤더니 남편도 크게 호응해 주었다. 우리 둘은 같은 곳에 작은 기부를 실천했다! 오래된 돌덩이를 내려놓은 것 같다.
엄마가 필요했을 시기마다 씩씩하게 자라 성인이 되어 첫 발을 내딛는 자립준비청년들을 후원한다.
잘 견딘 그대들에게 반드시 좋은 날은 올 것이기에 힘찬 응원을 보낸다~
잘 살면서 행복하기를!!
이제, 넷플릭스 하나는 구독해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