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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 지금 그대로를 사랑하기로 했다

당신이 물려줄 유산은?

by 꼬꼬 용미


“여보, 서장훈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절대 음식을 남기지 않고 김종국은 아버지의 절약을 물려받아 지독히 아끼잖아. 당신은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준 것 같아?”


좋은 습관을 많이 갖은 남편의 영향력이 왜 우리 아이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걸까? 불만스럽고 의문스러웠다. 아이들에게 훈육 하나 하지 않는 것에 핀잔을 주려다가 밥 먹으며 행복해하는 남편을 보면서 가볍게 질문으로 바꿔 던졌다.


우리 남편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정리 정돈 잘해, 집안일 잘 도와줘(채도 곱게 잘 썰고 껍질도 잘 까준다), 공부 잘해, 일 잘해, 집중력 좋아, 어렵고 두꺼운 책도 끝까지 다 읽어... 술 좋아하고 눈치 조금 없고 가끔 분위기 파악 안 되는 것 빼고는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들 셋이 아빠의 좋은 점을 하나도 닮지 않은 것이다. 몹시 이상하다. 매일 바빠서 늦게 들어온 탓인지, 남편이 잔소리를 일절도 하지 않은 탓인지 진심 궁금했다. 느닷없이 던진 질문에 남편은 해맑게 바로 답한다.


“우리 아이들은 아빠 닮아서 말을 예쁘게 하겠지.”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은 같이 살면서 한 번도 욕을 하거나 나쁜 말을 한 적이 없다. 심지어 싸울 때조차도. 나도 마찬가지지만 화날 때, 뭔가 일이 잘 안 되고 시간이 촉박할 때, 아들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짜증을 내거나 가끔 “아이 C”가 튀어나올 때가 있는데, 남편은 없다.


오메, 이쁜 내 새끼~ 어디 보자. 우리 똥강아지. 예뻐 죽겠네. ”

내 고향에서는 궁둥이 팡팡 때리며 '내 새끼'라는 말을 달고 사는데, 우리 아이들은 질겁한다. 새끼는 욕이라면서. 우리 남도에서는 흔하고 당연한 어감이라 아이들 반응에 난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말하면, 내 고향에서 쓸데없는 욕을 많이 듣고 자랐다. 언제고 어디서고 사투리와 욕 섞인 말들이 불쑥불쑥 들려오고 느닷없이 달려든다.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도 듣기 싫고 거북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청소년들이 지나가면서 욕 섞인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는 걸 들으면 깜짝깜짝 놀란다. 이건 소도시고 대도시고 남도고 북도고 서울이고 지방이고 크게 연관은 없어 보인다.


어쩜 친절하고 나긋나긋한 말투와 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서울사람이라서 남편이 더 멋있어 보였을 것이다. 그를 선택한 이유의 반 이상일지도. 남편은 절대 거칠게 말하지 않았으니까.


아! 몇 주 전에 남편은 취한 틈을 타 “재수 없어.”라고 내게 말한 것이 가장 나쁜 말이었다. 내가 의심의 문자를 보냈기 때문이다. 오해를 받아 많이 서운했던 모양이다. 평소 안 그러던 사람이라 나도 적잖은 충격을 받고 며칠 삐진 적이 있다.


“아~ 맞네. 당신은 말을 예쁘게 하지....”


어, 이게 아닌데? 트집을 잡으려던 것인데.... 뭔가 개운치가 않았다. 조용조용한 남편 말투는 종종 답답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바쁜 아침에 아들을 깨우라고 하면 남편은 다정하게 “ㅇㅇ야, 일어나.”만 두 번 말한다. 절대 다그치거나 서두르는 법이 없고 여러 번 얘기도 안 한다. 보드라운 그 소리를 듣고 아들은 잠에서 깨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 결국 내가 나서야 한다!

“아들! 7시 20분이야!”

“….”

“아직도 안 일어났어? 아까도 깨웠어. 벌써 두 번째야.”

그래도 못 일어나면 다짜고짜 이렇게 말한다.

“아들! 밥 먹어!”

눈 뜨자마자 아침을 먹어야 정신이 차려지는 막내는 밥 이야기가 직방이다. 나의 스킬을 남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따라 하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 남편은 정리를 참 잘해.”라고 칭찬했더니, 캠핑만 가면 시도 때도 없이 정리를 하고 있다. 돌아다니는 비닐봉지는 예쁘게 삼각형으로 접고 필요해서 꺼내 놓은 물건을 (내가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 도로 집어넣고 있는 게 남편이다.


“도마가 금방 어디 갔지?”

아주 속이 터진다.

“제발! 집에 갈 때, 한꺼번에 정리하자!”


물건을 늘어놓고 펼쳐 놓고 쓰는 타입의 나는 눈으로 보여야 마음이 편하고 그것을 보면서 아이디어도 생기고 할 일도 만들어 내기 때문에 넣고 감추고 정리해 버리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예술적이라고 할 수도 창의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말로 정리는 꽝이라는 얘기다.


거실에 놓인 커다란 책상 위에 책들이 쌓여가는 것을 몇 년째 지켜보던 남편이 한 번은 정리에 나섰다. 그의 손길이 지나 간 자리는 마치 요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순식간에 정리가 되어가는 것이다. 내 영역을 침범했다는 서운함보다 우선은 깨끗해서 좋았다.


하지만, 몇 달에 걸쳐 내 편리와 기호에 맞추어 반듯함은 허물어지고 다시 무질서하게 책들이 쌓여 갔다. 지금도. 이후 남편은 내 책상 정리만은 포기했다. 내 영역이라고 인정해 주는 것으로 타협했고 참아 주는 것에 감사한다.


정리와 집중력, 부지런함 등 남편의 좋은 습관들이 왜 우리 아이들에게 전해지지 않는 것인지, 그것은 매우 미스터리다!


그렇담, 나는 아이들에게 무슨 영향력을 주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갑자기 메타인지가 작동하며 내 머릿속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간다.


음…. 남 일에 참견하는 거, 아니 도와주는 거(오지랖)? 서두르는 거, 지시하는 거(해결사 노릇)? 나누는 거, 퍼 주는 거(많으면 나눈다)? 남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고 계획하고 전달하는 거(자기 주관적 참견시점 발동)?


좋은 게 하나도 없다! 아이들과 접촉 시간이 많고 모두 나를 보고 배울 텐데...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더 클지도.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나의 단점들이 아이들에게로 전부 다 전달된 것은 아닐까? 거울처럼 보여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인데...


가만있어 보자, 우리 아이들의 방은 옷과 책들로 늘 어질러져 있다. 공부한답시고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있는데, 성적은 오르지 않는다. 그래, 이것은 내 피였다. 해찰하고 참견하고 내가 물려준 습관(?), 유산(?)이었다. 남편의 좋은 점을 물려받길 원했지만, 내가 물려준 거였다.ㅠㅠ


후회가 밀려왔다. 남편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은 아닐까. 육아만 했는데, 자신감이 뚝뚝 떨어진다.


그래도 뭔가 좋은 점은 없을까?


능력은 없어도 열심히 한다. 근거 없는 자신감? 부딪쳐 보는 객기?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고 도전하는 똘기? 어떻게든 해내고야 마는 고집? 흘러넘치는 기백? 혼자, 집에서만 넘치는 걸지 몰라도 말이다.... 너무 약하다. 스스로 작아진다. 게다가 난 사람 많은 데서 말 한마디 못하고 주문이나 반품을 어려워하고 전화나 문자가 편하다.


우리 아이들은?


무대 위에 올라가 거침없이 노래를 부를 줄 알고, 봉사라고 시간 없다고 꺼려하는 반장, 부반장, 학생회 활동에 앞장선다. 거절 못하고 심부름이고 부탁이고 과제고 떠안고 와서 힘들어할 때도 있지만, 친구를 도와주고 함께 간다. 으쌰으쌰 응원하고 격려하고 반 분위기를 좋게 압도하는 분위기 메이커들이다.


어? 무대 공포만 빼면 내 피인데? 남편 피인가? 헷갈린다.


뭘 물어보면 부드럽게 설명을 잘하는 첫째는 여러 번 설명해 주고도 화를 내지 않는 여유를 갖었다.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침착하고 차분한 마음의 심지를 갖은 둘째는 스스로 해결하려는 마음과 노력으로 엄마를 성가시게 하지 않는다. 남의 마음을 살피고 도와주려는 자세, 인성 좋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뚝심으로 똘똘 뭉친 막내는 자신감이 넘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소유자다. 친구들 사이에 해결사 노릇을 하고 함께 끌고 가는 힘이 있다. 셋 다 노래를 잘한다. 박자도 잘 맞추고 확실히 이건 아빠 피다. 아들 셋은 싸우지도 않고 욕도 하지 않는다. 어릴 때, 그렇게 뭉쳐 다니던 삼 형제는 사춘기를 겪으며 각자 친구들에게 집중하고 있다.


안 닮은 줄 알았지만, 아빠를 닮았네.


정리 잘 못하고 어지러운 방 상태에 항상 불만스럽고 게으르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숨은 장점들이 참 많구나 새삼 느꼈다. 오래된 단독주택의 방이 너무 좁고 정리는 아직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앞으로 정리는 배우면 되는 거였다.


언제나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남편 말이 맞는 것 같다. 장점을 보지 못하고 한두 개, 나도 못하는 정리를 아이들에게 바랐던 것이었구나, 반성은 내가 해야겠다.


정리는 못하지만 청결유지와 청소는 내가 한다. 일관되게 단호하게 훈육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쪽은 나고 크면서 깨닫는다고 내버려 두라는 쪽은 남편이다. 나는 먹는 것에 온 신경을 쓰고 남편은 정리가 우선인 사람이다. 우리 부부는 서로 하나도 맞지 않는 극과 극의 상극이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단점만 보면 불만 가득, 싸움은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나름 균형을 잡고 잘 자라고 있다.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없는 구석, 단점을 보완해 주는 관계, 상생의 슈퍼울트라 궁합의 좋은 파트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남편과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우리 둘, 지금 그대로를 사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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