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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시 돌아갈래!

무럭무럭 자라는 엄마가 될 거야.

by 꼬꼬 용미


7월 여름은 무섭게 식물들을 키워낸다. 나도 두 팔 벌려 해를 보고 서 있고 싶다. 나도 좀 자라게 해달라고. 엄마 노릇 좀 제대로 할 수 있게 내 마음을 넓고 깊게 키워달라고! 마음속으로 외친다.


아침마다 마당 화분에 물을 준다. 토마토 열매를 따고 탐스러운 바질 향을 맡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연일 무더운 날씨에 한 번이라도 물을 주지 않으면 금세 시들어버리는 식물들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집 안에 있다가도 한 번씩 괜히, 마당이 궁금해져서 바깥으로 나간다. 그것들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고 한낮의 불볕더위를 이겨내며 헉헉대고 있는 기특한 녀석들에게 한차례 소나기 같은 물줄기를 뿌려준다. 수시로 식물들을 들여다보는 것과 초록초록하고 짙은 녹음의 향긋한 풀 향기를 맡는 것이 요즘, 나의 낙이다.


장미 두 그루 아직도 꽃을 피워요 / 방울 토마토, 요만큼씩 수확해요 / 다이소 1,000원 바질 씨에서 자란 풍성한 바질~


몇 주 전까지 아이들 공부는 내려놓고 나 하고 싶은 것을 찾는 게 옳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3 아들의 담임이 친절하게 아이 성적표가 궁금하면 톡으로 보내 주겠다고 하셨다. 요즘은 부모 도장 찍어 갈 일이 없어서 학교에서 보낸 성적표가 내 손에 도착하지 못한다. 학교에서도 그걸 알고 있나 보다. 나는 담임에게 성적표를 보내달라고 신청했다. 그리곤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동안 나는 뭘 했을까? 내 맘 편하자고 아이를 방치한 것이 아닌가.

그날 저녁 하교한 고3, 그 스윗한 둘째를 불러 세웠다.


“막판 내신에 더 신경 쓰고 점수를 올리기로 했던 거 아니니? 점수가 이게 뭐야? 공부한 거 맞아? 수업 시간에만 제대로 들었어도 이 점수는 안 나오겠다!!!”


(그 외 숱한 말들은 상상에 맡깁니다. 엄마들의 잔소리 레퍼토리는 비슷할 것입니다.)


저절로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그동안 두고 보며 믿어준다고 참고 있던 말들이 결국에는 화산처럼 폭발하고 말았다. 아마도 자책과 후회가 시너를 붓듯 나의 감정에 더 불을 붙였을 것이다.


둘째는 공부를 하기 싫다고 진작부터 말했었다. 그러면 운동과 음악을 잘하니까 기타를 본격적으로 배우는 건 어떨지, 체대 입시를 하면 어떨지 그간에도 여러 번 설득과 질문을 던졌었다. 음악 입시학원 원장은 하루 10시간씩 연습할 자신이 있거들랑 오라고 했었다. 아들은 상담도, 레슨도 거부했다. 10개월 혼자 배운 기타 실력을 높이 평가해서 내가 나선 것인데, 아들은 질색하는 것 같았다. 그냥 취미라고 애써 외면하면서.


그 기타는 남편을 위한 것이었다. 대학교 동아리 방에서 새 기타를 잃어버리고 기타에 대한 미련이 크다 해서 몇 년 전에 내가 사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들의 손으로 들어간 것이다. 하필 그때 기타를 왜 샀을까.


체대 입시는 운동과 공부를 병행해야 한다. 부담이 두 배다. 아들은 그것도 싫다고 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아들에게 당혹스러웠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고된 입시의 터널을 지나면서 결국, 이루지 못하는 꿈들이 허다할 텐데…. 꿈이 없다는 것은 어떠한 방향도 목표도 없이 표류하는 것과 같고 자기의 의지 없이 물 흐르듯 운명에 내맡기는 꼴이 아닌가?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키를 대체 왜 누구에게 맡기려는 것일까?


아들은 성적에 맞추어 대충 대학을 가겠다고 한다. 기가 막혔다. 학교가 스펙이 되고 능력의 잣대가 되는 세상에 열심히 할 생각은 1도 없다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성실하게 학교 잘 다니고 수업 시간에 졸지 않고 자율학습도 잘하고 학원도, 스카도 다니는데,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은 미스터리였다. 정말 모르겠다. 엄마 노릇이 이렇게 어려울 때가 없었다.


공부를 잘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후회가 없도록 고등학교 3년 만이라도 열심히 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열심히 해도 안 되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그 증거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길 바랐다. 다른 무언가에 빠져 그것을 너무 잘한다면 그것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타나 운동을 차선책으로 내밀었던 것인데, 아들은 요지부동이다.


내 목소리가 커지자, 오랜만에 일찍 들어온 남편이 안방에서 나와 말했다.

“당신은 좋은 말로 하지 않을 거면 말하지 마!”

취해서는 한마디 하고 남편은 들어가셨다. 아들에게는 좋은 말이든 충고든 말 한마디도 못 하고 나한테만 뭐라고 한다. 매우 섭섭하다. 하지만 안 변한다. 악역은 항상 내 몫이다.


아들이 엉엉 운다. 대항하듯 할 말 다하고 운다. 자기 때문에 우리가 싸울까 봐 또 울다가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사실, 아들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 없었다. 내가 할 말을 잊을 정도로 맞는 말이었다. 끝내 공부를 열심히 해보겠다는 다짐 같은 것은 받지 못하고 서로 마음만 상해 버렸다. 폭풍우가 휩쓸고 간 집안 분위기는 적막하고 쓸쓸했다.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엄마 원망하지 않겠다는 말과 (꿈을 이루진 못한) 엄마도 잘살고 있잖아! 하는 아들의 말이 너무 아팠다. 돌아보면 하고 싶은 욕망과 능력이 있었음에도 내 뒤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엄마의 관심도 정보도 능력도. 오직 혼자였던 그 입시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나의 인생을 잘 살고 있다는 그 한마디에 담기에는 무지 억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들에게 든든한 뒷배경이 돼 주고 싶었다. 드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에 무기 하나 정도는 쥐고 나아갈 수 있었으면 했던 거였다.


미국에서는 학교 공교육이 끝나면 4시부터 아이들의 세상이 펼쳐졌다. 공부하러 학원으로 가는 사람은 본 적이 없고 각자 자기 하고 싶은 것들을 했다. 우리는 호숫가로 달려가 나비와 애벌레들을 잡으러 다녔다. 그리고 낚시를 하거나 새를 쫓아다녔다. 책을 읽거나 읽어주고 자연 속으로 뛰어다니고 관찰하면서 그렇게 자유롭게 살았다. 난 익숙했다. 학원이라고는 주산 학원밖에 모르는 나와 오직 혼자 공부한 내 남편에게는 당연했고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미국 아이들의 창의력은 그러한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우리는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부를 시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한 학기에 수학과 국어 문제집 딱 한 권씩을 풀렸다. 그게 전부였다. 꼼꼼하게 봐주던 것을 서서히 아이 혼자 하게 두었다. 성실하다고 믿었고 아이에게 주도권을 주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제일 먼저 아들 방으로 갔다. 아들의 안부를 확인하고 마음을 내려놓았다. 혼내 놓고도 필요한 말이라도 조심해야 하는 세상이었다.


우리 때처럼 매를 들고 때리는 것이 나 잘되라고 때리는 것으로 고맙게 받아들이는 세상은 아니었다. 남편은 뚱해서 회사에 갔다.


“엄마, 나 헌혈해도 돼요?”

“네가 성인인데, 알아서 해.”

“그래도 부모님 허락을 받아야 한 대요.”

“그럼, 해도 되지.”


헌혈차가 학교에 왔나 보다. 그렇게 울던 녀석은 또 천진하게 내게 전화를 했다. 다행히 삐진 게 아니었다. 난 생각했다. 화내지 말고 낮고 위엄 있게 차근차근 설득력 있게 말했어야 했다고. 아니 그래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검사한 둘째의 공부 능력은 매우 좋다로 나왔다. 하지만, 하지 않겠다는 녀석에게는 소용없는 데이터였다. 스스로 언제든 성적을 올릴 수 있다는 자신감(아니 오만)으로 가득했던 녀석을 긁어 일부러 자극한 적도 있다. 100점이 줄줄 나올 줄 알았겠으나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것에 구멍이 났다. 아들의 능력은 하지 않겠다는 의지에 막혀 아무것도 발휘되지 못했다. 안타까웠다.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막내도 마찬가지다. 영어로 줄줄 말하던 녀석을 한국식 영어를 시키지 않으려고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아차 싶었을 때 내가 가르쳤지만, 하지 않으려는 마음에 영어책 몇 권을 쏟아부었지만, 남은 게 없었다. 지금 영어는 완전 망했다. 영어 문법의 ㅁ자도 알지 못하고 영어단어 수준이 초등에 머물렀다. 고1인데 말이다. 뒤늦게 영어학원을 알아봤지만, 받아줄 만한 데가 없다. 난 이번 방학 때,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Pay now or pay later?(지금 지불할 건지, 나중에 지불할 건지) 난 Pay later 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중학교 영어 단어부터 시작했다. 몇 개월을 설득해서 겨우 시작한 공부였다. 하루에 딱 100개씩! 용돈을 안겨가며. 난 널 위해 과외 선생님이 되겠다는 각오로. 아주 비장하게! 내 시간과 노력을 다 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딱 6일 후에 아들은 달아나 버렸다. 자기 자식 못 가르친다는 말이 있지만, 난 그 말을 뛰어넘고 싶었다. 나름 열심히 가르쳤는데, 내 목소리가 커지고 그것도 모르냐는 말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엄마랑 사이가 벌어지는 게 싫단다. 내가 미안하다고 절대 안 그런다고 다시 시작하자고 해도 끝나 버렸다.


남편이 일찍 와 안방에 있던 날이었다. 난 집에서 아이를 가르치며 애쓰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내 목소리는 더 커졌고 막내의 수치스러움도 함께 부풀었던 모양인데, 아이의 마음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 난 좋은 선생님은 못 되는 모양이다. 해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앞섰다.




영화 <박하사탕>의 설경구처럼 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초등, 중등 때 너무 놀렸나? 학원을 보내고 공부 습관을 잡았어야 했을까? 공부의 주도권을 내가 잡고 있을 걸.... 중학교 때는 진로를 찾는 게 중요하고 공부에 신경 안 써도 된다고 했는데? 선행을 시킬 걸 그랬나? 그때 기타는 왜 샀을까?


어느 순간으로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


<폭삭 속았수다>를 보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애순이에게는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준 엄마가 있다는 것이었다. 비록 10살에 잃은 엄마였지만, 엄마의 사랑은 지극히 강력한 것이어서 금명이를 엄마 광례처럼 키운다. 다정함을 잃지 않고 받은 사랑 그대로 다정한 엄마가 된 것이다.


우리 엄마는 큰 언니의 엄마였다. 엄마에게 셋째인 나는 귀찮은 존재고 혼자서도 잘하는 존재로 걱정 한 번 받아본 일이 없다. 첫 아이를 낳을 때도 시어머니와 남편이 내 다리를 하나씩 잡고 도와줬고 무사히 낳았노라고 엄마에게 기쁨만 전해 드렸다. 어릴 때, 엄마 주위를 돌면 엄마는 손을 바깥으로 저으며 나를 성가셔했다. 내가 받지 못한 사랑을 나는 주고 싶은데, 아들들은 거부한다. 방식은 달라도 나는 사랑을 전하고 있는데 말이다.


아~ 딸이 고프다. 절대 이룰 수 없는 것에 미련은 두지 말 것!


그리고 나는 엄마 노릇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공부의 주도권은 원래부터 아이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엄마 노릇만 하자!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채근해 주는 것도 엄마의 몫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달콤한 사랑도 주고 쓰고 신 맛의 조언이나 쓴 말도 나는 할 것이다.


고3 아들이 헬스하고 닭가슴살을 먹으며 몸을 만들고 있다. 열심히 닭가슴살을 사다 냉장고를 채워 놓으면서도 나는 고3인데? 헬스를? 굳이? 지금? 한 번씩 찔러댄다. 어느 때보다 영화를 많이 보러 가는 것을 알지만, 눈 감아 주고 성실하고 착하게 학교 잘 다니는데 무슨 문제 있어? 하면 학생은 배우는 게 일이야라고 정곡을 콕콕 찔러 줄 것이다.


나는 오늘도 열심히 엄마가 될 것이다. 설경구 배우가 기차 길에서 두 팔 벌리고 "나 다시 돌아갈래!" 라고 외치듯 햇빛과 바람과 흙을 통해 무럭무럭 자라는 식물처럼 나도 무럭무럭 자라는 엄마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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