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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옥 Nov 13. 2023

가죽 벨트가 있던 이발소




  손주 머리를 집에서 몇 번 잘라주다가 장난감을 사준다고 약속하고 미용실에 데리고 갔다. 연신 머리를 내젓고 있는 네 살배기 손주 앞에 휴대폰으로 만화 동영상을 보여주며 온갖 말로써 달래고 어르느라 진땀이 났다. 머리카락 자르는 것이 30여 분이 지나자 손주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심하게 몸을 흔드니 의자 위에 포개어놓은 미니 의자가 미끄덩하고 밀려난다. 놀란 나는 어린것이 다칠세라 껴안고 다독이며 겨우 머리를 자르고 나오면서 나 어릴 때 머리 자르던 추억을 떠올렸다.     

  어릴 때는 엄마가 어깨 위에 보자기를 둘러주고 햇볕 좋은 날 마당에서 머리를 잘라 주셨다. 그러다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자 그때부터 이발소에 갔다. 우리나라 최초 이발소로는 1901년 인사동에 있던 ‘동흥’ 이발소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는 언제부터 이발소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만 같았다. 미용실은 20 여리 떨어진 면 소재지에 있었기에 여자인 나도 초등학교 6년 동안은 이발소에서 머리를 잘랐다. 그 시절이 1960년대 중반쯤이다.

  이발소는 마을을 지나는 신작로 옆에 뿌연 먼지를 덮어쓰고 아무도 없는 빈집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만 시끌벅적했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은 시골이라 이발사는 다른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이발을 해주다가 정해진 날에만 이발소에서 마을 사람들 머리를 깎아 주었다. 커다란 격자무늬 나무문틀 사이에 유리를 끼운 출입문에는 홈이 파진 철제 손잡이가 반들반들 은빛으로 윤이 났다. 

  아귀가 잘 맞지 않은 그 문을 덜커덩 열고 들어가면 벽에는 제법 큰 거울이 붙어있고 그 아래 선반에는 가위며 바리캉, 비눗갑, 작은 양은그릇, 둥근 모양의 거품 솔, 포마드 기름과 로션 등 이발에 필요한 것들이 나름 정리되어 있었다. 바닥엔 두어 개의 커다란 의자와 세숫대야를 올릴 수 있는 다리가 긴 철재 삼발이도 있었다. 

  벽에다 못을 치고 걸어둔 갈색의 가죽 벨트는 낡아서 너덜너덜 해져있고 이발사는 그곳에 손잡이가 긴 면도칼을 쓱쓱 문질러서 칼날을 세우곤 했었다. 어린 나는 그 칼날을 보면 움찔움찔 두려움을 느꼈다. 

  이발사 아저씨는 어른들이 앉는 의자 위에 길고 좁은 나무판자를 올리고 나를 그 위에 앉게 했다. 나는 아저씨의 말에 따라 어깨 위에 꾀죄죄한 천을 두르고 얌전히 앉아서 머리를 조금 숙였다. 살칵살칵 가위 소리가 지루하게 나고 그 소리가 끝날 때쯤이면 목이 아파 고개를 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이내 아저씨의 손이 나의 머리를 더 아래로 숙이게 누른다. 그리곤 쨀깍쨀깍 쇳소리를 내면서 바리캉이 뒷목을 타고 오른다. 날이 무딘 바리캉이 머리를 집어서 아프고, 또 집힐까 두렵기도 해서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기도 했다. 

  “자~ 이제 다 되었다.”

  구세주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목소리뿐, 차가운 느낌의 면도칼이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었다. 마지막 마무리다. 있는 힘을 다해 참아냈다. 면도칼을 사용한 것은 단발머리보다 좀 더 세련된 가리야기가 끝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지금은 가리야기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데 요즘 상고머리와 비슷한 머리 스타일이다. 

  인사를 하고 이발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땐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이발한 요금은 내 기억으로는 일 년에 3번을 준 것 같다. 모든 식구가 필요할 때 이발을 하고 나면 이발사는 장부에 기록해 두었을 것이다. 두 번은 여름과 가을에 타작을 끝내면 보리 한 말과 나락 한 말을 주었고 나머지는 설 대목에 현금으로 주었다. 아마 마을 사람 대부분이 그런 방식으로 이발요금을 지급했던 것 같다.      

  요즘은 나 어릴 때와는 반대로 남자아이도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른다. 아이뿐만 아니라 성인 남자들도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는 시대가 된 것이다. 유명 연예인은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미용실이 머리를 다듬는 공통장소가 되었다. 예전엔 생각도 못 할 일이다. 이발소 간판에는 붙지 않는 ‘헤어숍’이나 ‘헤어디자이너’ 같은 외래어들이 이발소보다 미용실이 더 멋진 머리 모양을 완성해 낼 거라는 기대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둥근 원기둥에 파랑과 빨강을 사선으로 채색하고 뱅글뱅글 돌고 있는 이발소란 표시등을 보기가 힘들다. 주택가 대중목욕탕이나 후미진 뒷골목에서 어쩌다가 볼 수 있는 아스라한 추억이 되었다. 어쩜 머지않아 이발소 표시등과 함께 이발소가 없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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