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끝까지 쭉 한번 가보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이곳을 오가며 책을 살펴보거나 갖고 싶었던 책이 있는지 묻곤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책방의 열린 문 앞에서 언제든지 찾는 이를 따라가겠다는 듯이 많은 책이 골목까지 발을 내밀고 있다.
책방에는 자리를 지키거나 반갑게 손님을 맞는 주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갖고 싶은 책을 발견했을 때 “저기요~ 아저씨”라고 소리를 높이면 생각지도 못한, 헌책들이 있는 공간에서 쓰윽 나서는 주인장을 보게 된다. 그들은 이 골목과 책방과 일체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공기가 약간 낯선 듯도 했지만, 자고 있던 내 기억들이 슬슬 일어났다.
부산에서 살던 시절 여기를 자주 왔었다. 그땐 책을 좋아했던 아이들에게 새것으로 다 사줄 수 없는 팍팍한 살림살이였다. 갖고 싶어 하는 책과 다달이 나오는 문제집은 아이들 손을 잡고 영광도서나 교보문고에 가서 샀다. 그러나 참고서나 선행학습 교과서는 이곳 헌책방 골목에 와서 책방마다 물어가며 구했던 기억이 난다. 딸이 매달 한 번 정도는 손주 손을 잡고 서점에 가는 것을 보면 함께 책방 다녔던 일이 딸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듯하다.
보수동책방골목은 부산 지하철 1호선을 타면 갈 수 있다. 이 노선은 중앙역, 남포역, 자갈치역, 토성역을 지나게 된다. 이 4개의 역이 지도에서 보니 짧은 u자 모양으로 국제시장, 깡통시장 등이 있는 부평동을 감싼 모습이다. 그 끝점 중앙쯤에 책방골목이 있다.
위의 어느 역에서 내려도 걸어서 바로 가면 20여 분 정도면 갈 수 있다.
나는 자갈치역에서 내렸다. BIFF광장을 지나면서 연예인들의 손도장을 보며 추억의 영화를 떠올리고 먹자골목에는 비빔당면이나 어묵, 씨앗호떡 등 군것질거리도 많다. 놀거리, 볼거리로 가득한 국제시장, 깡통시장 구경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웬만한 건 이들 시장에 다 있다. 한 번은 일본 여행 갔다가 기념으로 사 온 과자와 소품들을 깡통시장에서 더 싸게 파는 것을 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
군것질로 배도 든든하고 눈요기로 즐거운 마음을 안고 걷다 보면 책방골목이 눈앞에 보인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은 대로변 건물 뒤쪽 좁은 골목에 있다. 고만고만한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마주 보고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골목을 지나면서 책방을 한눈에 쓱 훑어볼 수 있고 한 발 들여서 구경할 수도 있다.
이곳은 한국 전쟁 중에 미군들이 보던 잡지를 팔기 위해 어슬렁거리고 피난민들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갖고 있던 책을 팔려고 찾아들면서 헌책방 골목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냥 책방골목으로 통칭한다.
책방골목 초입에 들어서니 오른쪽에 기억하지 못했던 ‘보수동 계단’이 있다. 까마득히 바라보이는 계단은 셀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르고 높다. 이 계단은 오르기엔 벅차 보이지만 사진 찍는 장소로 책방골목의 명소가 된 듯하다. 아이 손잡고 온 부부도, 젊은 청년들도 그곳에서 사진을 찍는다. 중년의 아주머니가 사진을 찍고 나서 나도 기억하고 싶어 한 컷 찍었다.
헌책방이 많은 이 골목에 일부러 들른 것은 갖고 싶은 시집을 찾아볼 요량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노숙”이라는 시 한 편을 읽었는데 울림이 컸다. 당장 동네 서점에 가보니 시인의 시집이 한 권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단숨에 읽었다. 나는 시인의 시를 더 읽고 싶어졌다. 그러던 중 부산 여행을 하게 되었고 보수동 책방이라면 시인의 오래된 시집을 더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집부터 차근차근 살펴보는데 책방마다 특색이 있었다. 예전엔 아이들 책 위주로 찾느라 학생들 참고서나 교재가 주류인 곳만 눈에 들어왔는데, 역사서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 음악이나 미술, 예술 분야와 관련된 전문 서적을 취급하는 곳 등 여러 분야로 나누어진 책방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 옆에는 헌책보다 새 책을 더 많이 취급하는 서점도 보였다. 이들은 나름 어우러져서 책방골목을 존치시키며 책방골목의 명맥을 이어가는 듯했다.
나는 몇 군데의 책방에 들른 후 시집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사장님들을 만났다. 헌책이 많다 보니 일목요연하게 되어 있지는 않았다. 장르만 말하면 위치를 알려주면서 직접 찾아보라고 했다. 책방 안 구석구석까지 또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 이층이라 부르는 다락방까지 가서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시집을 세다시피 찾아봐도 내가 찾는 시집은 없었다.
책방골목 끝 지점에 있던 추억 속의 마지막 책방을 찾아가니 없어졌다. 골목 아래쪽 대로변에 대형 서점이 보였다. 이곳은 헌책과 새 책이 나란히 있는 간판만 ‘헌책방’인 곳이었다.
“김*인 시집이 있을까요?”
주인이 어렵게 찾아준 시집은 이미 내가 갖고 있는 것이었다. 책방 문을 나서는 내 발걸음이 더디 떨어졌다.
인터넷서점에서 살 수도 있는데…. 어쩜 시집을 핑계 삼아 이 거리를 한번 다녀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곳을 빠져나올 때 어스름해진 골목길 가로등에 불빛이 깨어났다. 저만치 아이들과 책 꾸러미를 들고 버스를 기다리는 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