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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었구나!

(소수서원에서 만난 인동초)

by 박정옥

살아 있었구나!



첫돌을 지난 손주 녀석이 얼마나 별난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아장아장 발걸음을 떼며 돌아다닌다. 아직 아긴데 싶지만, 온갖 장난감이나 책, 심지어 식탁 위의 밥그릇도 던지며 새로운 것을 탐색하느라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내 눈에는 손주가 하는 짓이 그저 사랑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더 많이 움직일 것을 생각해서 딸네는 살던 곳보다 조금 넓은 1층으로 이사를 했다.

이곳엔 베란다 앞에 뜰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참 좋았다. 봄이 되니 잔디며 제비꽃. 민들레와 돌나물. 토끼풀 등 작은 풀꽃들이 자연 그대로의 들판을 연상케 했다. 날씨 좋은 날은 그곳이 손주의 놀이터가 되었다.

“승규야, 초록 잎이야, 이건 개나리 노란 꽃이네. 여기 보라색 제비꽃도 피었어. 흠흠 해봐. 향기가 나지? 나비가 왔네, 나비안녕? 인사해 보자.”

알아듣던 모르던 상관없이 나는 손주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꽃집에서 창가에 올려둘 빨간색 꽃이 핀 제라늄 화분을 사면서 방울토마토 모종 두 포기도 같이 샀다. 창틀 난간 철제받침에 화분을 올려두고 토마토는 창 아래 땅을 일구어서 나란히 심었다.

토마토를 모종 하다 보니 풀꽃들 사이에 나팔꽃 새싹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튼튼한 싹을 골라서 창문 양 끝쪽에 옮겨 심었다.

어느덧 많이 자라서 휘청거리는 방울토마토 줄기를 긴 노끈과 나무막대를 이용해서 창살에 올려 주었다. 나팔꽃도 잘 자라서 잎이 아가 손바닥보다 커졌다.

우리는 수시로 창문 아래 텃밭에 나가 토마토를 살펴보고 잡초도 뽑았다.

“할머니, 벌레는 어떻게 해요?”

“음~ 승규생각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벌레가 식물 위에 붙어있는 걸 본 손주의 물음에 어떻게 답할까 당황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란다 창문까지 고개를 들이민 토마토 줄기에 열매가 맺혀있었다. 놀란 나는 호들갑을 떨었다.

“모두 나와 봐. 토마토가 열렸어!”

식구들이 주르르 창가로 와서 초록빛의 작은 토마토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참 숭고하다. 거름 하나 주지 않고 햇볕도 많이 들지 않은 땅에서 나팔꽃은 덩굴손을 쭉쭉 벋어 창살을 휘감고, 토마토는 열매를 맺고 조금씩 붉게 익어갔다. 더 놀라운 것은 가지마다 다닥다닥 많은 토마토가 달려 있었다.

손주는 수시로 밭에 가자고 졸랐다. 우리는 잘 익은 토마토를 따서 맛보기도 하고 토끼풀꽃으로 옛날 내가 그리했던 것처럼 꽃반지나 꽃시계를 만들기도 했다. 가끔은 손주랑 민들레 꽃씨를 후후 불며 씨앗 속에 꽃이 숨어있다고 알려주기도 했다.

그렇게 어느덧 여름이 와 있었다.

우리가 토마토에 푹 빠져있을 동안 나팔꽃 줄기는 1층을 지나 2층 언저리에 감겨 있었다. 아침마다 화려하진 않지만, 청보라 꽃을 피워냈다. 어느 순간부터 나팔꽃도 토마토만큼이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손주와 나는 오늘은 꽃이 몇 개나 피었나? 한 송이 두 송이… 세면서 숨어있는 꽃을 찾아내며 즐거워했었다.

비가 몹시도 많이 온 다음 날 아침이었다. 무성히 자란 나팔꽃은 잎사귀 사이사이로 청초한 꽃을 어여삐 피워내고 잎은 더 진한 초록으로 넓어져 창을 많이 가렸다. 이것을 본 딸아이가 예쁘긴 한데 창을 너무 덮어 답답해서 싫다고 했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한창 꽃을 피우고 있는 줄기를 자르기가 왠지 편치 않았다. 그러던 차에 경비아저씨가 아파트 외부도색을 하느라 정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편치 않던 마음을 다독이며 ‘그래 내 탓이 아니야.’ 하고는 싹둑 줄기를 잘랐다.

잘라낸 줄기는 금세 시들해졌다. 며칠 지나니 잎은 초록색을 찾을 수 없게 말라버리고 굵고 긴 줄기만 약간의 연둣빛을 남기고 마르고 있었다. 처음엔 맘이 아팠지만 이내 내 맘에서 별것이 아니게 되었다.

며칠 후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본 나는 깜짝 놀랐다. 텃밭 앞 잔디 위에서 줄기도 잎도 시들었는데 수십 송이의 나팔꽃이 피어있었다.

‘뭐지? 저 나팔꽃은….’

가슴이 쿵쾅거렸다.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하고 텃밭으로 가보았다.

잎은 제 색을 찾아볼 수 없게 말라버리고 수분이 다 빠져버린 줄기에 나팔꽃 봉오리들이 안간힘을 다해 꽃받침 속의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살아있었구나!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그 꽃들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딱 삼일을 더 볼 수 있었다. 그 마른 줄기가 피워내는 꽃을.

나는 며칠을 더 지켜본 후 꽃씨가 여물기를 기다렸다가 손주와 함께 그중 튼실한 씨앗 한 줌을 골라서 봉지 속에 소중히 담았다.



오래전 손주에게 빠져있을때 쓴 글이다. 요즘 부지런을 떨어 새글을 많이 써야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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