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
공항에서 만난 친구들은 저마다 한껏 단장한 모양새다. 5월 중순, 어떤 찬사라도 어울릴 듯한 이 계절을 선택한 것이 얼마나 좋으냐며 환한 표정들이다.
작년, 초등 단톡방에 여행 이야기가 올라왔을 때 반응은 다양했다.
“나는 제주에 친척이 살고 있어서….”
“가본 적이 있어서….”
어쩜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사정을 서툴게 변명하는 것이란 걸 알 수 있다.
“가시나, 이 나이 먹도록 제주도 안 가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난 스무 번 넘게 갔다 왔다.”
저마다 사정이 다르고 대꾸하는 친구들의 표현도 달랐지만 정작 함께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안타깝고 아쉬워서, 괜스레 거칠게 표현한다는 걸 안다.
소소리바람이 봄의 발걸음을 더디게 하는 3월에 초등학교 입학을 했다. 엄마가 만들어준 황토색 코르덴 상의에 소창으로 만든 손수건을 달고 엄마 손 잡고, 성큼성큼 앞서가는 아버지를 따라서 학교로 갔다. 넓은 운동장과 많은 사람을 보고 놀랐다.
산골의 봄바람은 어찌나 매섭던지 노랗게 민들레가 필 때까지 감기를 달고 다녔다. 소매 끝이 콧물로 반들반들해질 때쯤 학교생활이 익숙해졌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배우며 구구단을 외우고 우리의 산맥과 강을 외우며 동요도 배웠다. 남학생들이 고무줄을 끊기도 했지만, 살구놀이와 사방치기를 함께하며 쉬는 시간을 보냈다. 머리에서 이가 기어 나오고 머리카락 올올이 하얗게 새가리가 붙어있을 때 디디티를 뿌렸다는 사실을 친구들이 알아도 부끄럽지 않았다. 모두 그랬으니까.
배급받은 강냉이 가루를 무명 자루에 담아서 등짐처럼 지고 집으로 갈 땐 기분이 좋았다. 잊을 수 없는 옥수수빵도 급식으로 처음 먹어봤다. 어쩌다 하는 신체검사 날 발돋움해서 교실 창문으로 여학생을 훔쳐보던 남학생들이지만 시골 특성상 한 반밖에 없었던 급우들이라 졸업할 때까지 한 교실에서 부대꼈다.
육 학년 무렵부터 각자 다른 인생의 갈림길에 접어들었던 것 같다. 상급학교를 가기 위해 남아서 과외를 하는 친구, 농사일과 집안일을 하느라 끝내 졸업장을 쥐지 못한 친구, 초등학교 졸업만으로도 만족한 친구들은 양장점이나 양복점 등 기술직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육십여 명이 넘던 친구들은 하늘의 별이 되기도 하고 자신을 감추고 살기도 해서 단톡방에는 사십 명 정도 들어와 있다. 이 친구들은 어떻게든지 잘 살아내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중 이십 명이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 첫날의 저녁 식사가 회 정식이었다. 섬답게 온갖 해산물과 생선이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지게 나왔다. 보기 힘든 갈치회 고등어회도 나오고 손바닥만큼 큰 갈치가 구이로, 조림으로, 얇게 가루를 묻혀 튀김으로…. 완전 잔칫상이다.
어릴 때 가을 애호박에 단물이 들면 엄마는 갈치 한 마리를 사서 호박을 넣고 국을 끓여 주었다. 엄마 국대접엔 손가락만 한 꼬리나 톱니 같은 이빨이 보이는 대가리가 멀건 국물과 함께 있었다. 우리도 대부분은 엄마처럼 그렇게 살았다. 부모 모시고 자식들 잘 키우며 더 잘살아보려고…….
“가시나들아, 마이 묵어라. 이것도 좀 묵어봐라 싱싱하네. 이것도 맛이 있네.”
말은 투박하게 해도 살아온 삶을 알기에 허물없고 인정 많은 남자 동창생이 낯선 음식이 담긴 그릇들을 슬쩍 밀어준다.
관절염과 고지혈증이 있는 친구도 당뇨와 고혈압이 있는 친구도 맥주 한 잔, 소주 한 잔, 마다하지 않고 권커니 받거니 하며 즐긴다. 불콰한 얼굴로 제주 바다에 빠지고 있는 낙조를 배경으로 단체 사진 한 장 찍는 것도 잊지 않았다.
즐거운 날 음주 가무가 빠질 수 없다며 숙소 근처 노래방을 찾았다. 그 근처 딱 하나뿐이라는 노래주점엔 들어서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큰 방 하나로만 운영되는 그곳은 천장과 바닥까지 육면이 똑같은 도배지로 보였다. ‘모 초등 동창 회갑 기념’ ‘모모 중학교 동창 칠순 기념’ 등 검은색 네임펜으로 그려놓은 인생의 흔적으로 꽉 차 있었다. 우리도 그 축제의 서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끝내 한 줄을 새겨 두었다. “쌍포 초등 20회 칠순 기념”
우리는 안다. 여기 단 한 줄도 없는 ‘동창 팔순 기념’을 우리도 적을 수 없으리라는 걸. 단톡방에 있던 친구들이 모두 왔더라면……. 지금껏 맘 놓고 놀아보지 못한 칠십 평생의 노고를 노래와 춤으로 화끈하게 풀어내며 새벽까지 도깨비짓을 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한 친구가 내 팔을 슬그머니 당기면서 키득키득 웃는다. 그녀가 가리키는 손끝에는 방금 씻고 나온 다른 친구의 엉덩이가 보인다. 그 엉덩이에 실올이 터진 빨간색 팬티가 걸려있다. 웃음의 의미에 마음 아픈 ‘아직도’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동창들은 중소기업 사장들도 있고 대기업 임원급도 있고 경기를 타는 자영업자도 있다. 군 장성도 있고 고향을 지키며 농사를 짓는 친구도 있다. 부러워할 만큼 자식들을 잘 키워낸 친구도 있다.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저마다 단단히 자리를 지키며 살아내었다.
살아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 열심이란 말속엔 많은 뜻이 담겨있다. 종일 내리는 빗물보다 많은 눈물도 흘리고 진땀을 쏟기도 했을 것이다. 가늠할 수 없는 마음을 움직이는 일도 했을 것이다. 저마다 품고 있는 신에게 올리는 기도 또한 소홀하지 않았을 것이다. 햇귀 한줄기가 나에게도 비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미신이라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행했을 것이다. 자녀의 입시 기도를 할 때 빨간 양말을 신기도 하고 중요한 시험을 앞둔 가족에게 빨간 속옷 입기를 권유하기도 한다. 이런 행위들은 마귀 장난을 방어하고 행운을 바라는 양밥 같은 것이었다. 이 또한 열심이란 뜻에 포함되었던 우리의 삶이었다. 빨간 속옷을 입은 친구를 보니 슬픈 웃음이 났다. 어쩜 그녀는 그저 빨간색을 좋아했을 수도 있지만, 남은 생의 간절한 소망 하나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붉은 속옷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3일의 축제를 끝내고 돌아가는 날 예약해 둔 비행기가 폭우 때문에 결항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한국산문 26년2월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