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힘들었던 코로나, 그리고 아버지와의 이별

by 현성은

온몸을 가린 흰색 방호복….

콧속 깊숙이 사정없이 찌던 아픔…

기억나시지요. 몇 년 전까지도, 우리나라와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그리도 정말 모든 사람들을 힘들게 한 COVID19, 코로나입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저희 가족도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증상이 있어 다 같이 검사소에 가도 어떤 때는 모두 이상이 없다고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다 열이 너무 심해 다시 가면 한 사람만 코로나로 나오고 다른 사람은 이상이 없기도 합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코로나 결과에 양성 반응이 나올 때까지 계속 코로나 검사소를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집에서는 마지막까지 가장 건강했던 남편이 10번 가까이 가족들을 데리고 코로나 검사소와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특히 어떤 날은 검사소 건물을 두세 바퀴 돌 정도로 사람들이 많아 한나절을 기다려야만 검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코로나 검사에서 가족들 모두가 한 번에 양성이 나오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렇다 보니 코로나 검사를 하는 의료진과 공무원들의 수고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보기만 해도 숨 막히는 방호복을 입고 정말 쉬지 않고 사람들을 검사하고 치료해 주셨지요. 환자는 넘쳐나는데 의료진이 없어 의료진 본인들이 탈진해 쓰러질 때까지 우리들을 도와주시던 영웅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람은 간사합니다. 그때의 어려움과 고마움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너무 쉽게 희미해져 버리네요. 그래도 이렇게 기억을 더듬으며 글을 쓰니 한 사람이라도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내놓으셨던 하얀 방호복의 천사들이 생각나고 진심으로 다시 감사드립니다.


저희 가족이 처음 코로나에 걸렸을 때는 저만 양성반응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어머니가 코로나에 걸리셨습니다. 어머니는 치매시고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로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코로나에 걸렸기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남편과 큰아들이 어머니 휠체어를 밀고 코로나 검사소로 달려갔습니다. 이 날은 비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가야 하는 지역 코로나 검사소는 언덕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휠체어를 밀고 한 사람은 우산으로 할머니를 씌우고 본인들은 비를 맞으며 교대로 휠체어를 밀며 언덕 꼭대기에 있는 검사소로 갔습니다. 저희 어머니 몸무게가 80킬로가 넘습니다. 휠체어를 한 번이라도 밀어 보신 적이 있으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평지를 밀고 가는 것도 어려운데 80킬로가 넘는 분을 비 오는 날 언덕으로 밀고 가는 것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아들이 군대에서 행군했던 것보다 더 어려웠다고 얘기하더군요

글을 쓰는 지금 남편과 아이들이 너무 고맙고 미안합니다.


저는 몇 년 전 유방암 수술을 했기에 코로나 고위험군 환자로 분류되어 코로나 치료제인 팍스로비드를 처방받았습니다. 그런데 처방은 받았지만 팍스로비드를 갖고 있는 약국이 없어서 또다시 약국을 찾아 헤맸습니다. 남편과 아들이 어렵게 구해준 약을 먹었음에도 저는 심장에 이상이 와서 결국 고위험군 코로나 환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에 남편 차를 타고 가서 입원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입원한 날 밤에, 저는 집에서 걸려온 전활 받고 모든 치료를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병원으로 다시 온 남편 차를 타고 집으로 급하게 달려왔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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