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차 산업 디자이너가 일하는 방식
어려서부터 물건에 관심이 많았다. 가장 편리하고 직관적인 쓰임새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며 만지작거리는 게 취미였다. 그렇게 나는 입시미술을 준비했고, 산업디자인과에 들어왔다. 대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프로젝트·공모전에 참여하며 바쁘게 살았던 학부생 생활도 이제 곧 끝이 난다. 그래, 나는 취준생... 산업 디자인 전공 취준생..
선배를 만나든, 먼저 취업한 동기를 만나든 하는 말은 하나같이 똑같다. “학교에서 배웠던 거랑은 조금 달라.” 내가 궁금한 건, 그래서 어떻게 다른데? 산업 디자인하고 싶은데, 실무에선 대체 어떻게 일하는 건가요? 디자이너 선배에게 산업 디자이너의 일하는 방식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우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아마 디자인하시는 많은 분들이 사진도 잘 찍으시고, 정리도 잘 하실 거예요. 보통 디자이너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드는 직업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텐데, 사실 기존에 있는 걸 보기 좋게 또는 사용하기 편하게 정리하는 직업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도 대부분 다 잘하시지 않을까 생각해요.
2005년에 아이팟 나노 첫 모델이 출시됐어요. 아마 그때 제가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그 제품을 보면서 ‘이걸 만드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당시는 제품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개념이 없어서 저는 그냥 그런 사람이 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그 때 디자이너라는 꿈이 생긴 거죠.
대학교에서 산업 디자인을 전공했고, 3학년이 끝나갈 무렵 삼성 디자인 멤버십에서 활동했어요. 언제 커리어를 시작했다고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꼽아보자면 그때 커리어를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과소비가 조금 있어요. 굳이 필요 없는 제품이어도 만듦새가 너무 좋아서 덜컥 사버린다든가. ‘언젠가 나한테 좋은 레퍼런스가 될 거야’라는 마음으로 잘 사요. 자기합리화가 잘 먹히는 직업이에요.
옛날 애플 제품을 사는 걸 좋아하는데, 아직 확실한 레퍼런스가 된 적은 없어요. 다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디자인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어요.
우선 스튜디오를 만들 당초부터 계획은 베를린에서 스튜디오를 여는 거였어요. 그런데 코로나가 시작되고 해외를 나갈 수 있는 길이 끊겨서 우선은 서울에서 스튜디오를 시작했어요.
서울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는데 코로나 상황이다 보니 모두 화상 미팅으로 대체하게 되더라고요. 이러면 서울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베를린도, 서울도 아닌 제주도로 오게 됐어요.
일단 디자인 회사가 한국, 특히 서울에서 매일 수백 개가 생겨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한다고 해요. 그렇게 사라지는 수많은 회사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베를린에서 오래 지내본 적은 없지만 이방인에게 열려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사실 어딘가를 꼭 가고 싶다기보단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었어요.
네, 아주 대만족 중입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일을 하거나, 바다 앞 야영장에서 캠핑하면서 일할 때도 있어요.
디자인을 더 폭넓게 생각하게 됐어요. 제주도에서 살아보니 생활 패턴도 다르고, 서울에서 접하던 도구와 제주도에서 사용하는 도구도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았죠. 이 새로운 환경과 도구를 디자인으로 다뤄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요.
또, Ronan & Erwan Bouroullec 부훌렉 형제 디자이너를 좋아하게 됐어요. 이전에는 기계적이고 산업 집약적인 디자인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부훌렉 형제처럼 자연물에서 영감을 얻고, 그걸 다시 산업에 적합한 형상으로 재해석하는 게 멋있어 보여요.
직장인이냐 운영자냐의 차이가 가장 커요. 회사를 다닐 때는 내 디자인을 설득하고 합의하는데 꽤 많은 단계를 거쳐야 했어요. 팀원, 대표님, 클라이언트까지 최소 세 단계의 합의가 필요한데 그 과정에서 제가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디자인이 흘러가는 일이 많았어요. 물론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이 과정에서 더 좋은 디자인으로 발전하기도 해요.
지금도 팀원이 있지만 이미 상당 부분 의견 합치가 되어있어, 클라이언트만 설득하면 돼요. 이전에 비해 훨씬 자유롭죠!
아이디어를 꺼내는 작업을 할 때는 한 공간에 오래 머무르지 않아요. 늘 일하던 책상에 있으면 답답한 느낌이 들어서요. 굳이 한 시간 넘게 가야 하는 카페를 간다거나 바다가 보이는 곳에 가기도 해요.
집안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니죠. 곳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꾸며놨어요. 한 쪽 구석에는 해먹, 테라스에는 캠핑의자를 두고, 식탁도 작업하기 좋은 식탁으로 놨어요.
잘 그리는 게 아니라, 잘 기록하기.
가장 중요한 건 머릿속 생각이에요. 잘 그리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리는 걸 주저하다가 좋은 생각이 날아갈 버릴 때가 많아요. 생각이 떠오른다면 바로 그려서 종이에 기록해두는 게 중요해요. 스케치를 할 때는 그림을 잘 그리려고 욕심내지 말고, 스케치는 기록용이라고 생각해야 해요.
아무래도 산업디자인이 실물을 다루는 직업이다 보니 스케치를 하거나 스터디 목업을 만드는 일이 필수적이에요. 그러다 보니 연필, 자 등을 많이 쓰기도 하고, 좋은 연필이나 목업 도구들을 보면 괜히 사 모으기도 해요. 물론 맥북도 많이 사용합니다.
디자이너가 클라이언트로 와도
나만이 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설득할 수 있어야 해요.
학교에서도 실무와 관련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실제 현업은 일하는 방식이 너무 빠르기 때문에 100% 실무를 배우는 것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실무는 사실 현업에서는 배우는 게 맞지만, 점점 현업에서는 바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요. 그 간극을 메워주는 영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디자인을 배울 때는 디자이너가 아닌, 디자인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디자인 회사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실무의 세계에 들어서니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어요. 디자이너로서 경력도 대단하신 분들이 클라이언트로 찾아오시는 거죠.
디자이너가 클라이언트로 와도 나만이 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그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물론, 디자이너가 아닌 분과 일할 경우에도 이런 제 나름의 엄격한 잣대로 일하려고 합니다.
사실 저는 어떤 방식을 고집한다기보다는 디자인 과정의 매 순간마다 필요한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해요. 디자인은 아이디어를 만드는 것만큼 수많은 아이디어들 중에서 가장 좋은 ‘선택’을 하는게 중요해요. 그렇게 제가 제안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향으로 결과물을 만들죠.
그러면 디자인을 보시는 분들이 ‘이런 식으로 문제를 풀어가시나 봐요’, 한마디를 해주시는데, 그 말을 들으면서 제 방식이 정의되는 것 같아요. 제 디자인을 보시는 분들이 오히려 제 방식을 정의해 주시고, 저는 그렇게 제 방법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어요.
아무래도 SWNA에서 같이펀딩 태극기 함 프로젝트에 참여한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제가 무한도전, 특히 김태호 PD님의 엄청난 팬인데 업무로 만날 수 있었던 게 아주 큰 영광이었어요.
태극기함은 아이디어 단계, 생산,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모든 과정을 집약적으로 경험한 프로젝트라 더더욱 기억에 남아요. 보통 제품디자인을 하더라도 디자인 단계의 일부분만 경험하거든요.
탈잉의 장주상 디자이너님께서 제안을 주셨어요. 이전에 디자인 진흥원이나 학교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라는 점, 온라인 강의라는 점에 흥미를 느껴 참여했습니다.
보통 그런 강의에서는 제가 진행했던 디자인, 디자인 업계의 흐름 등 파편·단편적인 이야기를 주로 다뤄요. 그런데 이번 강의는 스케치부터 모델링, 목업, 재장과 생산 등 디자인의 전 과정을 알려드리기 때문에 디자인을 하는데 필요한 직접적인 방법을 세세하게 알려드릴 수 있었어요.
보통 온라인에서 볼 수 있는 산업 디자인 강의는 3D 툴을 가르쳐주는 강의가 많았어요. 실제로 그런 강의라고 생각하시기도 하고요. 그래서 강의 제안을 받았을 때 툴 강의가 아니라 산업 디자인 작업의 전체 과정을 알려줄 수 있는 강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산업디자인 전체 과정을 다 설명하면 아무래도 길고 재미없는 내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탈잉과 논의할 때도 왜 전체 과정을 다뤄야만 하는지 설명하는 자료를 만들어서 설득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마침내 완성한 커리큘럼에는 제품이 디자인되는 전 과정, 스케치부터 생산되기까지를 모두 담았습니다.
신입 때는 회사 또는 회사의 선임 디자이너와 일하는 것 같았고, 지금은 클라이언트를 직접 대면하며 일하고 있어요. 신입 때는 내부의 팀이 얼마나 긴밀하게 협업해야 하는지를 배웠고, 지금은 이 팀이 클라이언트와 얼마나 좋은 협업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를 느끼고 있어요.
그렇게 배우고 느끼는 것이 하나하나 쌓이면서 과정 별로 어떤 것이 필요한지 깨닫고 있어요.
학교에서 실무로 넘어가는 단계에 계시는 분들께 가장 추천드려요. 보통 학교에서는 디자인 지식을 배우는데, 저는 이 지식들이 실무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려드려요.
요즘 모델링 스킬이나, 렌더링 스킬 같은 특정 툴 사용을 배우는 것이 아닌,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를 어떻게 실무에서 활용하면 좋을지에 대한 내용을 강의에 담았어요. 이 강의로 멋진 디자이너가 되는 튼튼한 기초를 쌓으시길 바라요.
아, 산업디자이너는 이렇게 일하는구나! 망망대해 같았던 디자이너로서의 앞날에 등대가 생겼다. 산업 디자이너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일하는지 알았으니, 이제 실무에서 활약해 볼까? 튜터님, 저도 성공해서 제주도로 떠나겠습니다. 제주에서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