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비를 만났을 때, 200% 즐기는 실내 여행

비가 긋는 빗금 사이로, 여행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다

by 하루담음

일기예보에 그려진 작은 우산 아이콘 하나가 설레던 마음을 눅눅하게 적시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불청객의 노크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맑은 하늘 아래서 찍으려 했던 인생 사진들, 햇살을 받으며 거닐고 싶었던 야외 명소들의 목록이 빗물에 번진 잉크처럼 희미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은 망했다'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떠나온 길,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비 젖은 거리로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 내 여행의 채도를 완전히 바꿔놓으리라고는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쫓기듯 들어선 곳은 어느 고요한 미술관이었습니다, 혹은 낡은 책 냄새가 나는 작은 서점이었을 수도 있고, 습기를 가득 머금은 식물원이기도 했습니다. 밖에서는 세차게 내리꽂히던 빗줄기가 실내의 두터운 유리창 너머에서는 그저 아름다운 배경막이 되어주었습니다.


평소라면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해'라는 조급함에 쫓겨 스쳐 지나갔을 그림 한 점, 문장 한 줄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신발 끝이 조금 젖어 축축한 느낌조차 묘하게 안락하게 느껴지는 순간, 나는 깨달았습니다. 맑은 날의 여행이 세상을 넓게 보는 것이라면, 비 오는 날의 여행은 세상을 깊게 보는 일이라는 것을요. 타닥타닥 창을 때리는 빗소리는 공간을 가득 채우는 천연의 백색 소음이 되어, 들떠있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여행을 떠날 때 완벽한 날씨와 완벽한 동선을 꿈꿉니다. 하지만 여행의 진짜 묘미는 예기치 못한 변수 속에 숨어있을 때가 많습니다. 비가 와서 들어간 카페에서 인생 커피를 만나고, 비를 피하려 들어간 박물관에서 잊고 있던 과거의 나를 마주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비 오는 날의 실내 여행은 단순히 '대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날씨가 허락해 준, 오로지 나와 내 옆의 사람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밀도 높은 시간이었습니다. 빗물에 젖어 색이 진해진 숲을 바라보며 마시는 따뜻한 차 한 잔의 온기는, 쨍한 햇살 아래서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은 위로를 건넸습니다.


축축하게 젖은 아스팔트 위로 도시의 불빛이 반영되어 일렁입니다. 이제 나는 여행지에서 비를 만나도 더 이상 한숨 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비는 여행을 망치는 방해꾼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 서서 숨을 고르라고, 풍경 대신 분위기를 즐기라고 다독이는 자연의 신호일 테니까요. 젖은 우산을 접으며 들어선 낯선 공간에서, 비 오는 날에만 맡을 수 있는 그 비릿하고도 그리운 흙내음을 맡습니다. 이번 여행은 비 덕분에,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비 오는 날 여행, 망친 줄 알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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