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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어 마이 데이지 Oct 18. 2024

자,살자들의하루

Chapter 1: 박하영



람 하나 불지 않는 후덥지근한 여름밤, 하영이는 어두운 방에서 선풍기 바람으로 더위를 견디며 탁상 스탠드 하나만 켜고 책상 앞에 앉았다. 풀다 만 문제집 위에는 샤프와 지우개가 널브러져 있고, 문제집 사이에는 굵은 지우갯밥이 끼어 있다. 하영이는 눈, 코가 겨우 보이는 손거울을 들고 작은 눈을 이리저리 관찰한다. 최대한 눈을 크게 떠본다. 앞트임을 한 것처럼 몽고주름을 쭉 펴본다. 연필꽂이에 꽂힌 꼬리빗의 뒷부분으로 쌍꺼풀을 만들어 본다. 하영이는 만족스러운 듯 쌍꺼풀이 사라지지 않게 눈에 가득 힘을 주며 거울을 들여다본다. 이내 쌍꺼풀이 풀리면서 선풍기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하영이의 얼굴이 보인다. 까무잡잡한 피부에는 여드름이 가득하고, 숱 많은 곱슬머리를 스트레이트 매직 펌으로 빳빳하게 펴둔 것이 영 부자연스럽다. 선풍기 바람에 이마에 붙어 있던 짙은 파란색의 기름 종이가 떨어졌다. 거울 속에 비친 하영이의 이마에 살짝 눌러도 나올 것 같은 검은 피지가 모공의 구멍이 도드라져 보이게 나와 있다. 하영이는 피지를 짜내고 싶은 쾌감에 거울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본격적으로 피지를 짤 준비를 했다.



그 순간 “삐삐삡” 현관문 도어록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굽이 좀 있는 무거운 슬리퍼를 벗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하영이의 엄마다. 하영이는 혹시나 엄마가 방 문을 열고 들어올까 봐 수학 문제집 아래로 거울을 재빠르게 숨기고 연필을 들었다. 터벅터벅 피곤이 느껴지는 엄마의 발소리가 하영이의 방을 지나쳤다. 뱅그르 돌아가는 사무용 회전 의자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엄마는 곧장 엄마 방으로 들어간 것 같다. 하영이는 인사도 없이 방으로 들어간 엄마에게 서운하다. 딴짓하고 있는 것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지만 내심 서운한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짜증이 났다. 하영이는 수학 문제집 아래에 숨겨둔 손거울을 다시 꺼내어 거울을 본다.



‘내 이름은 박하영이다. 고1, 열일곱 살. 나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싫어했다. 어릴 적 아빠는 1시간 내내 나에게 수학 문제 하나를 설명하다 질리셔서 아빠는 나를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셨고, 엄마는 받아쓰기를 봐주시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셨다. 그 이후로 엄마, 아빠와 공부해 본 기억이 없다.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의 성적표를 궁금해하지 않으셨다. 그래도 그나마 잘하는 게 미술이라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그림도 못 그리는 게 만화가가 되려 한다는 말에 만화가가 되기를 포기했다. 아빠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 착해서 손이 안 간다고는 하지만 아빠는 그냥 나에게는 관심이 없다. 나는 집이 싫다. 하지만 집이 아니면 있을 곳이 없다. 그래서 그냥 내 방에서 혼자 있는 게 가장 좋다. 어차피 공부해라 뭐하냐 간섭하는 사람 하나 없으니까.’



하영이는 거울을 보며 피지를 짜다 보니 엄마에게 서운했던 감정이 금방 잊혀졌다. 볼에 난 커다란 여드름이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금방 터질 듯하다. 하영이는 그 곪을 대로 곪은 여드름 옆에 있는 피지를 조심해서 짜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덜컥! 쾅!!” 매미 소리,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던 하영이의 방문이 세차게 열렸다. 화들짝 놀란 하영이의 손이 미끄러져 여드름이 톡 하고 터져 거울에 피가 뾱 하고 튀었다. “아!” 하고 아픈 소리를 내며 하영이는 동그랗게 놀란 눈을 하고 문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문지방에는 형광등 빛을 등지고 서 있는 언니가 있었다. 갑작스럽게 새어 들어온 형광등 빛에 눈이 부셔 언니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언니의 실루엣으로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언니의 실루엣이 하영이는 걱정이다.



‘언니는 어릴 때부터 자기 멋대로였다. 부모님 모두 언제나 언니 편이었다. 한번은 미용실 놀이를 한다면서 나의 앞머리를 없앴는데 내가 속상해서 울어도 엄마, 아빠는 언니가 나와 놀아주느라 그런다며 나를 이해시키려 했다. 이해할 수 없다며 더 크게 울면 장난친 것 가지고 운다며 소심하게 굴지 말라는 말뿐이었다. 특히 내가 가장 힘들 때는 언니가 기분이 좋을 때와 안 좋은 때의 태도가 다를 때였다. 기분이 좋을 때는 나를 잘 챙겨주었다. 그래서 서로 웃으며 노는 날도 꽤 있었다. 어린 나이에 바쁜 엄마, 아빠를 대신해서 밥도 챙겨주고 나를 괴롭히는 남자애가 있으면 가서 혼도 내주는 착한 언니기도 했다. 하지만 기분 좋지 않은 땐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무시하고 욕도 했다.



‘이건 오래 되지 않은 일이다. 언니가 옷을 사러 같이 가자며 가기 싫어하는 나를 끌고 백화점에 갔다. 언니는 여러 옷을 입어보느라 바빴다. 나는 쇼핑을 해본 적이 없다. 어려서부터 언니가 입던 옷을 물려받거나 엄마가 언니와 쇼핑하러 갔다 사온 옷을 입었기 때문에 나는 백화점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언니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녔다. 나는 쇼핑 내내 긴장해 있었다. 한번은 언니가 외투를 입고 거울 앞에 섰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 거울 앞에 언니와 마주보며 거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런 내가 짜증이 났는지 언니가 말했다.


“야, 얼쩡거리지 말고 꺼져! 뭐 하는 거야.”


‘언니의 짜증 난 말투에 백화점 직원이 나를 한심한 듯 쳐다보았다.‘


‘한두 번 있던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 앞에서 창피한 일을 당한 게 창피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데 우는 나를 보면 언니가 화를 낼까 무서워 안 보이는 곳으로 숨어 눈물을 훔쳤다.‘


‘이런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서 그럴까? 언니의 발소리만 들으면 긴장이 되고, 언니와 대화할 때는 눈치가 보여 자꾸 조심하게 된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나에게 언지라도 주면 조용히 찌그러져 있을 수 있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왜 또 기분이 안 좋은 걸까? 무슨 말을 하려 온 건지…. 혹시 사오라던 샌드위치를 사오지 않아서일까? 오늘은 운이 좋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때였다.


“야, 박하영! 내가 샌드위치 사오라고 하지 않았냐? 어딨는데? 또 까먹었냐? 너는 제대로 하는 게 뭐냐? 그따구로 작은 심부름도 못하니까 네가 되는 일이 없는 거야! 아, 씨발 존나 배고파.”


하영이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에 서툴다. 화가 날 때, 속상할 때, 서운할 때와 같이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 눈물이 먼저 흐른다. 초등 고학년 정도에 이미 터득해야 했던 다양한 감정 표현을 하영이는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하영이를 잘 아는 언니는 하영이가 혐오스럽다.


눈물이 그렁해서 머리를 책상에 푹 숙인 하영이를 뒤로 하고 문을 쾅 닫았다.


그러고는 고된 하루를 보낸 엄마에게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엄마!!! 나 밥 줘!!!”


‘사실 오늘 오후 학교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 언니가 빵집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사오라며 문자를 했다.‘


‘역 앞에 있어서 까먹을 수 있는 심부름이 아니었다.‘


‘그냥 가기 싫었다.‘


‘어차피 지나가는 길에 빵집이 있어서 몸만 돌리면 들어갈 수 있었어도 언니를 위한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도 물 가져다 달라 하면 가져다줘야 하고, 혼자 가기 싫은 치과도 예약도 없는 나를 데리고 가서는 마냥 기다리게 만들었다.‘


‘언니와 가는 길에 좋은 말 오가지 않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렇게 쌓인 일들에 나만 할 수 있는 복수는 언니의 심부름을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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