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트렌드와 새로운 음식의 소개에 따라 다양한 채소를 먹어볼 기회가 많다. 그런 와중에도 철이 되면 시장과 마트에 깔리는 배추를 먹으며 항상 느끼지만, 배추는 참 맛있다. 아삭하고 달고 고소하다. 가끔 폭등하는 가격만 제외하면, 훌륭한 채소다.
수십 년째 한국인의 소비량 1위를 차지하는 채소지만, 예전에는 의외로 지금처럼 흔한 작물이 아니었다. 1000년 전쯤 한반도에 전래되었는데, 맛은 좋았으나 종자 관리가 어려워 널리 퍼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서민의 식탁 위로 올라온 흔적이 보인다.
지금처럼 대량 재배가 가능해진 것은 국내에서 종자를 개발한 1950년대 이후이다. 하지만 일단 기술이 뒷받침되자 엄청난 인기로 기존의 김치 주재료였던 무를 단시간에 대체하고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90년대를 정점으로 생산량과 소비량은 줄어드는 추세이다. 그러나 그 용도가 다른 작물이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직도 일정 수준의 수요는 절대적이다.
배추는 꽃이 십자 모양이라는 뜻의 ‘십자화과’에 속한다. 십자화과는 종 간의 교잡이 잘 일어나는 편이다. 예를 들어 배추와 양배추를 교잡하면 유채가, 겨자와 배추의 교잡으로 갓이 탄생한다. 배추가 처음 수입되었을 때는 근처에 심어놓은 다른 십자화과 작물과 의도치 않은 자연 교잡이 빈번했기 때문에 종자 관리가 어려웠다. 그러나 종자 관리 기술이 발전한 요즘은 오히려 다양한 신품종을 개발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십자화과 작물들에게는 어딘가 비슷하게 통하는 알싸한 맛이 있는데, 그 원천은 ‘글루코시놀레이트’라는 황 화합물 집단이다. 원래는 방어를 위해 만드는 물질이지만 인간 입장에선 건강기능성 성분으로 여긴다. 이들은 세포가 파괴되는 외부 자극이 생기면 특유의 알싸함을 풍기는 형태로 변한다. 양배추, 무, 배추, 갓, 겨자 등의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향미는, 분자의 끄트머리 구조 약간만 다를 뿐 공통점이 훨씬 많은 글루코시놀레이트 화합물이 분해될 때 발생한다.
이들의 공통점 중 가장 주목할 부분은 선택적 항균성이다. 이 성분들은 대부분 박테리아의 성장을 막는 역할을 하는데, 유독 유산균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오랜 세월 발효채소로 활용된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겠다. 소금에 절여 세포가 살짝 파괴된 십자화과 작물 주변은 유산균의 독무대다. 산소를 차단하고 온도를 유지하며 유산(젖산)을 만들어 약간의 산성 환경까지 스스로 조성하면 아주 오랫동안 다른 균들은 침범할 엄두를 못 내게 된다.
배추는 20도 정도의 서늘한 온도에서 광합성의 효율이 좋지만, 한편으로는 영하의 온도에도 당도를 높여가며 견디는 작물이다. 심어서 수확하기까지는 품종과 환경에 따라 60-100일 정도가 걸리는데, 이런 조건이 자연스럽게 맞는 곳을 찾는다면 남한에서 배추 농사가 잘 되는 지역은 얼마 되지 않는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 배추를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는 핵심 기술은 ‘육묘’다. 통제된 환경에서 싹을 틔우고 자란 어린 배추를 성장할 때가 되면 넓은 곳으로 옮겨 심어 필요한 시기에 상품이 되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배추 성장에는 봄과 가을 기후가 맞는다. 우리나라의 봄과 가을은 짧고 여름과 겨울은 길다. 그러므로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서는 육묘가 필수적이다.
철 따라 기다려 먹을 수 있는 여느 작물과 달리, 배추는 일 년 내내 찾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배추가 자랄 수 없는 더운 여름에도, 유일하게 재배가 가능한 강원도 고랭지 출신의 배추가 전국에 유통된다. 그런데 매년 기후 상승으로 고랭지의 면적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여름 배추값 폭등은 이제 수입을 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게 되어 가고 있다.
겨울에는 가장 늦게까지 배추가 얼지 않는 남쪽이 최후의 보루다. 토질이 맞는 넓은 농토 덕에 해남이 한겨울 배추 공급의 절반 이상을 담당한다. 2월까지 수확이 가능하며, 저장성이 좋아 저온으로 보관하면서 초봄까지도 전국의 배추 수요를 감당한다.
배추 수요의 대부분은 김치다. 따라서 배추의 품질은 김치에 얼마나 적합한가에 의해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생으로 먹기 때문에 아삭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이 중요하다. 당도가 높으면 어떤 채소라도 인기가 좋으며 발효에도 도움이 된다. 배추 특유의 알싸한 향이 강한 것은 스트레스 환경에 저항하며 튼튼하게 성장한 흔적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는 단단한 조직감, 높은 당도, 발효 안정성까지 담보하는 강력한 증거다.
배추는 영양분을 잎에 저장한다. 광합성을 위해 펼치는 대신 안쪽으로 오므린 형태의 이런 저장형 잎 구조를 ‘결구’라 부른다. 크기에 비해 묵직한 것은 결구가 촘촘하게 형성되었음을 말한다. 결구의 노란색은 카로티노이드가 축적되어 생기는 것인데, 진할수록 색으로 표시되지 않는 다른 영양소들도 밀도 있게 쌓이는 편이다. 다만 이런 특성을 가진 ‘황구’ 배추는 국내에서 개량된 품종으로, 외국 품종에는 적용되지 않는 평가 지표다.
결구에 영양분을 잘 모으기 위해선 광합성을 할 겉잎부터 건강해야 한다. 가장 먼저 자라난 겉잎들은 햇빛을 모으는 책임을 짊어지고 크고 억세게 성장한다. 하지만 김치로 먹기엔 적합하지 않고 유통에도 불편하므로 수확할 때 대부분의 ‘웃잎을 걷어’ 우거지라 부르고 따로 이용한다. 예전에는 가정에서 말려 썼지만 요즘은 가공업체에서 염장 냉동한 제품이 대부분이다. 부드러워질 정도로 푹 익히는 요리에 주로 쓰인다.
요즘은 겉잎보다는 맛이 좋은 알배기만 찾는 수요가 높다 보니 아예 전용 품종이 생겼다. 조금 작지만 빠르게 결구 중심으로 성장하는 이 알배추는 대부분 하우스 재배를 하기 때문에 가격은 약간 높지만 공급이 안정적이다. 잎 사이즈가 적당해 쌈용으로 가장 많이 쓰인다.
봄이 되자마자 아직 얼어있는 땅을 갈아 키운 데서 이름을 얻었던 얼갈이도 이제는 전용 품종을 개발해 따로 재배한다. 얼갈이배추는 결구가 없다. 잎이 안으로 굽지 않고 길쭉하게 자라며, 재배기간도 한 달이 약간 넘는 정도다. 봄, 가을 노지 생산이 많지만 일 년 내내 하우스 재배량도 꾸준하다. 달고 고소한 맛보다는 연한 식감과 풋풋한 푸성귀의 향을 살리는 용도로 사용한다.
배추를 조금 늦게 심으면 결구를 만들기도 전에 추위를 맞는다. 아직 덜 자란 배추는 새로 자라는 잎을 넓게 펼쳐야 조금이라도 광합성을 더 하고, 낮게 깔아야 바람을 덜 맞으므로 우리가 아는 봄동의 형태로 성장한다. 전에는 이른 봄에 잠깐 쓰였지만 품종이 개량된 요즘은 겨울 내내 볼 수 있으며 4월이면 추대가 시작되어 상품성이 없어진다. 육묘 없이 노지에 파종하므로 생산비가 낮고 저렴하다.
배추는 우리 현대사 속에 늘 있어 왔으며, 문화적으로 깊이 스며들어 있는 작물이다. 전래동화를 소개하는 일을 하필이면 배추도사가 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만 원짜리가 가장 큰 지폐이던 시절의 별명이 배춧잎이었던 데서는 다른 잎사귀에는 부여된 바 없는 상징성을 볼 수 있다. 유명했던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 휘둘러진 것이 만일 배추김치가 아니었다면, 많은 이들에게 그토록 선명히 각인될 수 있었을까?
이제 한국형 배추는 김치 문화의 전파를 따라 해외로 종자를 수출하기도 한다. 김치를 가져가는 것은 너무 비싸고, 현지나 다른 나라 품종으로는 한국 김치맛을 못 내기 때문에 아예 종자를 수입해 가는 것이다. 그 양이 크게 늘고 있으며 종자 산업의 성장은 선진국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정작 본국인 우리나라의 상황은 대조적이다. 농업 인구가 줄어들며 자급률이 떨어진 지 오래고, 최근에는 기후 변화로 적합한 재배지마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예전에 북한과 교류가 있을 땐 배추 종자를 가져다 심는다는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막연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것은 배추가 이미 우리에게 없어도 안 먹으면 그만인 채소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