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중 겉껍질이 잘 안 떨어지는 품종을 겉보리라 부르는데, 겉보리 알곡에 싹을 틔우고 더 자라기 전에 건조한 것을 엿기름이라 한다. 맥주를 만드는 맥아와 비슷하지만 용도가 달라서 쓰이는 품종과 가공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대체가 가능할 정도는 아니다. 어쨌든 특히 보리싹을 동서양에서 모두 애용한 이유는 효소가 풍부하기 때문이었다.
씨앗이 발아할 때는 가지고 있던 영양소를 분해하여 성장에 사용하기 위해 여러가지 효소를 만들어낸다. 효소는 미생물이나 효모 같은 생명체가 아니고 단백질로 구성된 특정 화합물이다. 모든 생물이 영양소를 섭취하거나, 저장하였다가 다시 쓰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의 효소를 이용해 잘게 쪼개는 과정을 거친다. 생명체 안에서는 필요에 따라 쓸지 말지를 조절하는 시스템이 있지만, 효소만 따로 모아서 쓰게 되면 단순히 온도와 접촉기회에 따라 활성하는 정도가 결정된다.
우리나라에서 엿기름을 활용한 대표적인 음식은 식혜와 조청이다.
엿기름은 말린 보리싹을 분쇄하여 만든다. 보리껍질, 전분, 단백질, 효소 등이 섞인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효소만 골라내기 위해 많은 양의 물을 첨가해 불리고 희석하는 과정을 거친다. 껍질처럼 큰 성분은 거르고 작은 성분은 침전시키는 과정을 거쳐 맑은 윗물만 쓰는데, 여기에 효소가 녹아있다. 이제 이 물에 잘 지은 밥처럼 효소가 반응하기 좋은 상태의 전분을 넣고 효소가 활성하기 좋은 온도에 맞춰주면 엿기름에 있는 효소는 ‘당화’를 착실히 수행한다. 전분을 잘게 자르면 당이고, 이 과정이 당화이다. 엿기름(맥아)을 사용할 때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당을 ‘맥아당’이라고 부른다. 요약하면, 엿기름에는 맥아당을 만드는 당화효소가 많이 들어있다.
식혜는 이 원리를 충실하게 이용해서 쌀을 단맛이 나는 음료로 만든 것이다. 엿기름 자체에는 풋풋한 말린 싹 특유의 향이 있고, 가열 과정에서 일부는 날아가고 일부는 변형되며 식혜 특유의 풍미를 만들어낸다. 풍미를 조절하고 효소의 기능을 멈추기 위해 마지막에 한 번 끓이는데, 전분이 사라졌기 때문에 끓여도 죽처럼 걸쭉해지지 않는다. 밥알은 전분이 녹아 가벼워져서 둥둥 뜬다. 맥아당은 설탕에 비해 훨씬 덜 달기 때문에 요즘 입맛에는 싱거워서 설탕을 타 먹는다. 하지만 당으로서의 기능은 그대로여서 부족한 단맛을 채우려다 보면 혈당 스파이크가 오기는 더 쉽다.
식혜를 발효시키면 술이 되어 ‘감주’ 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누룩을 이용해 바로 발효하는 양조기술에 밀려 주류가 되지는 못했다.
식혜를 걸러 계속 가열해 졸인 것이 조청이다. 원리를 알면 어려워 보이진 않지만, 막상 만들려면 꽤 많은 재료, 시간, 노력이 필요한 음식이다. 그런데도 조청은 전통적인 한식 레시피에서 단맛을 내기 위해 사용되는 거의 유일한 식재료다. 그리고 조청을 한국처럼 다양한 요리에 활용한 사례도 세계적으로 찾기 어렵기 때문에 한편으로 조청은 한국 전통음식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특이한 현상이다.
여기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가장 결적정인 원인은 ‘대안의 부재’라고 할 수 있겠다. 꿀을 대량 생산할 만한 양봉업 기반이 없었고, 포도나 대추야자 같은 달콤한 과일이 넉넉하지 않아 졸여서 시럽을 만들 수도 없었다. 게다가 사탕수수 농사도 지을 수 없었는데, 주변의 나라들이 설탕을 생산하거나 수출하기 시작한 후에도 이상하리만치 적은 양의 설탕만 수입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쇄국정책과 일제강점기의 공급제한 등 역사적 흐름과 엮이면서 실제로 대중에게 설탕이 넉넉하게 공급된 것은 1953년 이후 미군의 물자 원조가 처음이었다.
이제 조청은 설탕과 물엿, 올리고당과 수많은 간단한 단맛 재료들에 자리를 뺏기는 중이다. 전통 한식의 정취가 필요할 때는 아직 조청을 써야 할 것 같지만 새로운 세대들에게 조청은 이미 먹어본 적이 거의 없는 낯선 감미료다. 이렇게 빨리 바뀔수가 있나 싶다가도, 그토록 쉽게 놓아버릴 만큼 만드는 과정이 고단했던 음식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옛것이라는 묶음 속에 현대와 경계 지어지는 모습이 아쉬우면서도 그것을 놓은 손으로 쥐고 있는 새것들을 보면 돌아가긴 어렵다는 것을 절감한다.
조청, 또는 맥아당의 현대적인 이용을 위해서는 단맛보다는 다른 특성에 주목해야 한다. 수분을 더 증발시키면 굳는다는 점, 과당이 없어 내열성이 좋은 점, 그리고 역설적으로 당도가 낮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시럽은 흡습성이 있어 끈적끈적함이 남지만 조청은 엿처럼 단단해질 수 있다. 겉에 얇게 발라서 천천히 수분이 날아가도록 구우면 바삭해지는 것이다. 열에 강한 것도 이 경우엔 큰 장점이다. 반응성이 좋은 과당이나, 과당이 절반인 설탕이 갈변반응하는 온도에서도 맥아당은 훨씬 서서히 색이 변한다. 음식의 단맛을 주고 싶을 때에는 쓰기 어렵지만 거꾸로 음식의 단맛을 주지 않고 다른 물성을 이용하고 싶을 때에는 효과적이다. 달지 않은 양파잼, 오랫동안 촉촉한 케이크, 바삭하고 광택있는 북경오리 껍질 등 맥아당 자체의 장점을 살려 이미 쓰이는 사례들을 참고할 만 하다.
조청의 수분 함량은 약 20% 정도이다. 조청을 천천히 더 졸여서 수분함량을 10%까지 줄이고 식히면 비로소 단단한 ‘엿’이 된다. 엿기름은 엿 만들기 위해 잠깐 기른 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