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적인 삶은 정신적 사고가 멈추기 전까지 노화의 과정에도 인간은 생각하며 경험하고 새로운 것은 학습하면서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사실 인생이란 끊임없는 변화와 경험의 연속이다. 모든 생명체는 수명이 있는 법이므로 개체마다 서로 다른 생존방법을 터득하듯 인간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인생을 배우고 체험하며 성숙해지는 과정을 겪는다.
알 수 없는 수명 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다 보면 그 안에 수많은 만남과 사연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슬픔도 있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므로 사회와 타협해야 하고 자신을 절제해야 하며 상황에 대처하는 관계의 기술도 습득해야 하지만 자신의 이익 때문에 선과 악의 기로에 서야 할 때도 있다. 때로는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피해와 상처를 주게 되고 불법이 아니라면 자신을 묵인하고 애써 외면하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내면의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것이 양심이며 양심은 도덕과 윤리에 따라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게 되지만 그 보다 강한 것이 유혹이고 탐욕이다. 어떤 결정을 내리던 그것은 본인의 몫이지만 그 결정이 남에게 피해를 준다면
자신에게도 가책이 되어 상처를 남기게 된다.
인생에서 진정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신앙이라면 신앙과 종교는 내면의 고뇌와 갈등을 제어할 수 있는 불변의 원칙이며 그로 인해 얻어지는 위안과 평화는 세속에서의 어떤 것보다 소중한 삶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
오랫동안 폐병을 앓는 노인이 차마고도 오체투지 순례를 하며 즐거워한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금방 쓰러질 것 같은 고통의 상황에서 순례 도중 죽을 수 있는 것은 가장 큰 영광이라는 노인의 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육체적 고통마저 행복이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현상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신앙이라면 분명 인간의 의지와 능력을 초월한 신앙은 존재하는 것이다.
중세시대의 가톨릭은 세계를 지배했다.
모든 권력이 가톨릭 체제 안에 있었고 유럽의 왕들 역시 모든 정책을 교황의 인가 하에 실시할 수 있었다. 종교를 명분으로 한 전쟁은 수 세기 동안 피의 역사를 만들었고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한 살육과 약탈은 종신적인 계급사회를 만들고 범람했던 피의 대가로 교회를 세우고 왕국을 건설한 종교의 권력은 종교법을 통해 백성들에게 불변의 희생을 강요하고 힘없는 백성의 피와 땀으로 그들의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함께 절대적 권력이었던 종교도 모습을 달리했고 신 중심에서 인간의 생활 속으로 전파되었으며 그 과정의 절대권력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했던 많은 성인들은 박해를 받고 처형당했다. 교황을 위한 사제가 아닌 진실한 성직자와 수도자는 희생돼야 했으며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탐욕으로 교회는 분리되었고 개신교가 등장한 것이다. 어찌 보면 사랑을 실천한 많은 의인들의 숭고한 희생의 결과로 오늘의 교회가 존재하는지 모른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고 그 의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비만해진 가톨릭 권력을 비판하고 신 중심의 종교가 인간 중심으로 바뀌는 명제를 던진 표현이다.
시대가 바뀌고 문명의 발달과 함께 과학은 엄청난 발전을 거듭했고 과학은 인류의 환경을 변화시켰다.
과학이 눈에 보이는 결과와 혜택을 제공하고 합리적인 이론을 증명하게 되면서 종교의 권력은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현실과 동떨어진 교리와 결실이 드러나지 않는 신앙은 과학에 비해 설득력이 없었고 기도의 응답은 아무에게나 쉽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강력한 권력으로의 종교적 기능은 유명무실 해졌다.
그러나 변화를 거듭한 시대가 바뀌고 모든 것이 풍족한 오늘날에도 세속의 가치는 한계가 있으며 그 한계 내에서 인간은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고 신앙생활을 한다.
사실 대부분 종교의 교리는 보편적인 긍정의 원리와 선과 악의 구별, 인본주의가 기본이지만 교회는 아직까지도 절제와 인내, 희생을 요구하고 교회법을 강조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든 설득력 없는 교리는 공감을 얻을 수 없다.
종교마다 교리에 의한 가치가 있고 추구하는 목표가 있기 마련이고 그 목표로 가는 과정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위안이 신앙이고 믿음이라 할 수 있지만 믿음이란 강요에 의한 세뇌가 아니고 짧은 기간에 얻을 수 있는 지식도 아니며 조건도 아니다. 진정한 교회의 역할은 선과 악의 기준으로 천사와 악마를 구분하고 교회법으로 죄를 선별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자들에게 삶의 위안을 주고 사랑을 전파하며 진실한 믿음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종교지도자라 하더라도 남의 영혼을 간섭할 수는 없으며 선교를 명목으로 의무를 강요하고 교회법으로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면서 논리적이지 않은 설교나 강론을 주입하는 것은 신앙에 부작용만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릇된 종교의 세뇌가 사상과 결합하여 분쟁이 끊이지 않는 사태가 일어나는 원인은 선과 악의 개념이 변질되어 적과 원수를 만들고 복수와 증오를 양산하는 이기적인 종교 갈등 때문이다.
아직도 종교의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서 테러가 발생하고 있으며 종교 갈등은 인류와 함께 끝나지 않을 숙명인지도 모른다.
세속의 가치로는 절대 측정할 수 없는 종교적 의미를 언어로 설명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종교는 존재하고 신앙은 세속이 주지 못하는 가치와 의미를 선사하기 때문에 인류와 함께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세상은 무한하게 발전하고 있다. 완벽을 지향하는 과학은 인류의 생활을 바꾸어 놓았고 시대의 변화와 함께 정의는 언제나 권력으로 편입되고 현대문명은 경제적 가치를 최고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며 유형의 자산을 위한 경쟁은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 됐다. 그러나 인간은 물질적 안정으로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연명하고 의미 없이 늙어 가는 생명체가 아니며 공감각적인 변화에 수동적으로 적응해야 하는 무력한 피조물이 아니다. 저마다 추구하는 가치와 그에 따른 의미는 다르지만 세상이 주는 만족은 주어진 환경과 소유의 질과 양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요즘 교회에 가면 젊은 사람 보기가 힘들고 주일미사에도 빈자리가 조금씩 늘어난다.
이러다 보면 교회에는 나이가 든 사람들만 다니는 곳으로 인식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하고 점차 교회의 역할, 신앙의 의미마저 소멸되어가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언제나 교회는 사랑을 전파해야 하고 누구에게나 따스한 영혼의 피난처가 되어야 하며 고단한 삶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고신앙을 통해 삶의 가치를 향상하고 교회에 올 때마다 정화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은 신학과 논리, 과학적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며 성직자의 강론이나 설교로 포장될 수도 없다.
이 시대의 교회는 성전이 아니라 사회구조 속에 하나의 시스템으로 자리를 잡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신성한 미사 전례에서 정치, 경제적인 이슈가 강론이 되고 성직자들의 권위적 만용이 신자들의 발걸음을 돌리게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할 뿐 아니라 이익을 창출하는 기관과 다름없는 역할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첨단 과학의 시대, 물질문명의 혜택만큼이나 폐해 역시 거대하게 대두되어 우리가 사는 자연이 파괴되고 경제적 이익만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 세상에서 종교마저 정체성이 흔들리고 신앙의 존재가 상실되는 현실이 불안하기만 하다.
그나마 가톨릭, 크리스천 신자들의 미약한 의무감이 오늘을 지켜 주는 신앙의 위력이라 위안을 하지만 무엇이든 미약한 소명은 언제고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청년들의 정서가 화폐로 전환된 시대에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 교회는 소중한 지침을 전달해야 할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변화될수록 교회의 교리는 원론적 강요가 아닌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을 전파해야 한다.
흔히들 ‘성찰’과 ‘승화’라는 말을 많이 한다. 특히 가톨릭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자주 인용하는 단어이긴 하지만 좀 더 깊숙이 성찰과 승화의 의미를 짚어 본다면 사실 성찰은 억압이고 승화는 합리화일 뿐이다.
현실의 고통은 성숙을 위한 성찰이고 쓰라린 결말을 승화로 위로하는 심리요법과 같은 것이며
다름 아닌 성찰과 승화는 성직자, 종교지도자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쓴 ‘방랑자’에서 “Jesus loves even you."(예수님은 심지어 당신도 사랑하십니다.)라는 구절은 선과 악을 초월한 조건 없는 사랑을 강조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결코 공평할 수는 없으며 공평한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때로는 불공평하게 다가와도 우리에게는 의지 할 수 있는 신앙이 있고
희망과 믿음이 있기에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믿음과 사랑을 전파해야 하고 평화와 위안을 주는 안식처이어야 하며 언제나 열려 있는 모든 이의 공간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