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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머니 Jun 16. 2021

하이델베르크, 그리고 철학자의 길

스웨덴 출장 세번째 이야기

철저한 보안과 엄격한 퇴근 정책(?) 덕분에 처음에 모호해 보이던 업무는 오히려 스케쥴을 앞당겨 빨리 진행되기 시작했고, 일정에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뒤늦게 제한적으로 인터넷에 접근 가능한 방법을 알아냈고, 그 당시 출장 오기 전 280pt(지금으로 환산하면  2,800pt)로 최고의 전성기를 자랑하던 코스닥 주식들을 제일 먼저 확인했다. 이번 출장과도 관계가 있지만, 다들 코스닥 주식에 관심들이 많았으니 :)


좀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게 거대한 IT버블 붕괴의 서막에 불과할 줄은 그 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직도 그 때 고점가격의 반도 회복 못하고 있으니... 20년 전 일이다.


아무튼 출장 막바지에 다가오면서 여유가 생겨서 주말에 좀 멀리 떠나기로 했다. 필자가 하이델베르크를 강력히 주장했다. 


왜냐고? 철학자의 길에 가 보고 싶어서였다.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등 내가 중2병 발병 시점에 병적으로 좋아하던 철학자들의 나라인데다 철학자의 길이라니... 흠... 사실 과학고를 간 이유도 자연철학과 현대과학을 구별못한 무지의 소산이다. 


과학고 입학 오리엔테이션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칸트라고 적고, 좌우명으로 "네 의지의 격률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라고 적어... 과학고 내 문과생으로 낙인 찍힌 적도 있다. 


철학이나 과학이나 같은 거 아니었어? 그래도, 그 무지의 소산으로 어쨌든 밥은 잘 먹고 다니고 있다.


뭐 암튼 해외 여행 처음인 막내의 의견대로 모두 하이델베르크로 갔다. 일단 스톡홀름 호텔 방을 체크아웃하고, 수하물을 잠시 창고 같은데 맡겼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먼저 갔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열차를 타고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길은 진짜 아름다웠다. 정말 봄내음이 가득했다. 우울했던 스웨덴 날씨와는 차원이 틀렸다. 


하이델베르크에서 간단하게 시내를 둘러보고, 숙소를 잡고 햄버거 사고 오는데, 멀리서 코와 입에 체인을 걸고 스킨헤드를 하고 가죽잠바를 입은 남녀들이 갑자기 다가왔다.........그리고, 그 중에 남자 하나가 갑자기 다가오더니......





"... 쿠다사이".....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손을 정중히 내밀었다. 놀라서 100유로짜리 지폐를 줬던가? 그러니까, "아리까도 고자이마스" 그러면서 90도로 인사를 하고 자기 동료들한테 가더라구...


멋진 거지였다.


그 당시는 비록 버블경제가 붕괴되긴 했지만, 그래도 일본경제가 엄청났고, 그래서 해외를 주름잡던 몽골로이드들은 대부분 일본인이라...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릴때도 항상 외국인 승무원들이 "사유나라"하면서 인사해줬다. 넥타이 매고 남자들 3~4명씩 돌아다니는 몽골로이드들은 거의 일본인이었으니... 


지금은 "짜이지엔"을 더 들을 수 있을려나?


어쨌든 이틀동안 시내 박물관도 가고, 학생감옥도 구경하고, 하이델베르그 성도 다 돌아보고... 그리고, 마지막 대망의 철학자의 길.. 하이라이트를 위해 마지막에 남겨났다.


이정표를 따라 철학자의 길을 걸었다. 언덕길이었다. 그냥 언덕길이었다......

그냥 언덕길이었다....

형님들한테 상당히 미안해 지더라... 다들 말들이 없어지고...


괜히 머쓱해 있는데, 한 형님이 "아 진짜 철학하고 싶다"해서 다 같이 웃었다. 아.. 여긴 혼자 와야 하는 곳이구나... 철학 안 하길 잘했다.. 등등 정말 많은 철학적인 생각들이 들었다.


어쨌든, 그 이후에도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잘 기억이 안 난다. 따뜻한 곳에 있다가 추운 곳으로 다시 돌아가서 지독한 감기에 걸렸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여정도 경유하던 파리에서 시간이 여유로워 쇼핑한 기억이 드문드문 나는 데, 사실 그것도 나중에 가족들 기념품 산다고 파리에서 산 물건들 때문에 기억난다고 착각하는 걸 수도 있고....


어쨌든 일부 기억은 완전히 삭제됐다. 지독한 감기에 독한 감기약(덩치 큰 북유럽 사람들이 먹는 거라 그랬나?) 덕분에 그 긴 비행시간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정말 어떻게 온 거지?


아무튼 이렇게 첫 해외 출장, 첫 해외 나들이는 마지막이 아주아주 허무하게 끝났다.


뭔가 철학적이지 않나?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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