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10
오늘은 20km 정도 되는 코스로 6시쯤 출발하였다. 지금까지 5시 전에는 출발했으니 나름 여유로운 출발이라 할 수 있겠다.
이라체 수도원을 지나는 경로이기에 어제의 남은 와인을 나름 기대했으나 한 모금도 맛볼 수 없었다. 하루에 100L씩 나눈다고 하던데 나에게 까지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괜찮다. 이런 공간을 직접 보게 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로스아르코스로 향했다.
첫날 피레네산맥을 넘을 때 말고는 까미노닌자에 두 개의 길이 나온 적이 없었는데 오늘의 순례길은 두 갈래로 안내되었다. 갈래길에 안내표시가 있겠지 하고 걸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17.9km 왼쪽으로 가면 16.8km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6.8km를 선택해서 10m쯤 걸었을까.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라체 수도원에서 만난 커플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갔더니 지금 내가 가는 길은 산길이란다. 오른쪽으로 가야지 덜 힘들다고 말해주었다. 그제야 고개를 드니 내가 가려고 했던 길에 산이 있는 게 보였다. 아, 아차. 신기했다. 방금까지 그 산이 눈에 정말 안보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짧게 걷는다고 들떠있던 마음에 0.9km라도 덜 걸어보겠다고 표지판만 무작정 보고 간 것이다. 이럴 수가 있구나. 사람이 이렇게 흐린 눈을 하게 되는구나.
그 커플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오른쪽길로 들어서는데 정신이 멍했다. 어차피 걸으려고 온 길 아닌가. 그깟 1km쯤 더 걷는다고 다리가 부서지는 것도 아닌데 숫자만 보고 짧은 길을 선택했던 내가 너무 창피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왜 이 길을 선택했나, 다시 생각이 들었다.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내리쬤다. 4,5월에 오면 청보리가 푸릇하게 예쁘다는 길을 지났다. 구름이 없으니 무척이나 더웠다. 땅만 보고 걷다가 바람이 잠시 스쳐가 시원해지니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때 보인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 묵묵히 걷고 있는 앞서간 순례자들이 보였다. 그 뒤를 걸으며 0.9km만 봤던 내가 부끄러웠다.
<오늘의 기록>
이동 도시 Estella 6:05 -> Los Arcos 12:14
거리 24.5km
걸음 39.981
내일도 부엔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