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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무개 Nov 13. 2023

이유 있는 일탈

만 서른 여자, 담배를 배웠다

   서른이 넘도록 담배를 입에 댄 적이 없었다. 사춘기를 혹독하게 앓았어도 노는 아이들과 거리가 멀었기에 술담배를 해 볼 생각을 못 했고, 대학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배운다는데 나는 대학엘 가지 않았다. 집안 분위기도 보수적인 데다 집식구 모두 비흡연자라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주변에 애연가들은 제법 있었다. 친구, 남자친구, 회사동료. 여자든 남자든간에 그들에 대한 내 시선은 곱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 피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익숙하지 않음도 있었고, 폐암으로 죽은 엄마 생각이 나는 것도 있었고, 간접흡연이 너무 싫어서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들로 남녀노소 나이 성별 막론하고 담배연기에 절여진 녀석들을 조금 못마땅해하는 편이었다.

   지난 명절 친척들을 만났다. 어떤 얘기를 하다가 친척어른이 여자들이 길가에서 담배 피우는 게 보기 싫다는 말을 하였다. 세상이 변했어도 남자들이 피는 거랑 여자가 피는 것은 받아들이는 게 다르다고 했다. 여자가 담배 피우는 건 천박해 보인다고도 했다. -그 집 아들은 개꼴초다.- 아무리 그래도 천박하다니… 담배마저도 차별적 혐오가 존재한다는 것에 괜한 반항심이 들었다.

   금연을 했다가 고된 노동으로 다시 담배를 입에 문 친구가 술 먹고 한 대 땡긴다기에 한 갑을 사줬다. 술상에 놓인 담배를 보니 친척어른의 말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다녔고 친구가 피우던 것을 빼앗아 쭉 빨아들였다. 겨우 한 모금만에 켁켁대며 이딴 걸 왜 피우냐고 고개를 저었다. 입에 계속해서 남아있는 씁쓸한 맛이 기분 나빠 차인표를 모방한 분노의 양치를 하고 에잇 드러누웠다.

   며칠 뒤 친구집에서 술을 마시다 문득 담배생각이 났다. 술 먹고 피우는 담배가 그렇게나 맛있다던데… 곧장 온전히 한 대를 피우고 한숨 자고 일어나 한 대를 더 태웠다. 그 후로 술만 마셨다 하면 담배 생각이 절로 났다. 결국 내 손으로 담배를 구입했고 그걸 사게 되기까지 피운 것은 고작 2개비하고 한 모금이었다.

   거나하게 취한 채로 부족한 술과 안주를 사겠다며 동네마트를 휘젓다 계산대에 가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에쎄 히말라야요… ”를 뱉어냈을 때 내심 캐셔가 놀라길 바랐다. 3년을 줄창 이용했어도 담배 한 갑 산 적이 없었으므로 무슨 바람이 불어 사가지?라는 의문을 품길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한 개만 필요하냐며 꼴초손님과 동태눈의 캐셔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계산을 마치고 나왔다.

   약간의 찝찝함과 성취감을 부둥켜안고 얼른 한대 해치우자며 빈 공터에서 불을 붙였다. 타들어가는 꽁초를 지켜보며 친척어른의 말을 곱씹었다.

   ‘여자가 담배 피우는 건 천박해 보여…‘

지 돈 주고 산 기호식품에 왜 성차별이 존재해야 하는지 관자놀이 부근에 지끈거리는 쑤심이 느껴졌다.

   다음 날 자고 일어났는데 방에 둔 담뱃갑에서 나는 니코틴 냄새와 흡연 시 입었던 옷에 베인 그을음내가 너무 역했다. 혈액에 돌던 술이 다 빠져나가 알코올필터(?)가 사라진 모양이었다. 다들  한 대 피고 들어왔을 때 온몸에 감도는 그 역한 냄새를 맨 정신에 어떻게 참아내는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도 술만 마셨다 하면 담배타령을 하는 내가 참 모순되고 어이없었다.

   루틴형 인간인 나는 휴무마다 술을 들이켰고 그때마다 담배 한두 개비씩 피는 것이 습관이 돼버렸다. 그러던 어느 퇴근길에 맡은 남의 담배냄새에 “맛있겠다. ”를 내뱉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중독의 길에 접어들겠구나. 집에 도착하자마자 싱크대 상부장에 쑤셔 넣어둔 것을 꺼냈다. 지퍼백에 밀봉했대도 역한 냄새가 풀풀 새어 나왔다.

   손에 쥔 푸른 담뱃갑을 내려다보았다.’ 뇌졸중‘ 수많은 사람들이 큼지막하게 쓰인 무시무시한 병명을 한 시간마다 한 번씩 보고도 아무 생각 없이 즐긴단 것이 갑자기 기괴하게 느껴졌다. 담뱃갑을 찍어 친구에게 보내고는 “너는 심장병, 나는 뇌졸중”이라며 깔깔 웃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쓰레기봉투에 밀어 넣었다. 나름대로 뜻깊은 일탈이었다. ‘천박한’ 자유와 반항으로부터 오는 해방감에 가뿐한 기분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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