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하는 게 참 많았다. 사람들의 무심함과 건조함이, 부대끼는 텐션이, 감정의 과잉이, 불필요한 인사치레가, 독학했나 싶은 예의범절이… 열 개 요소가 존재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싫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 맷집이 조금 붙은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안 되니 삶의 방식을 바꾼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내 삶의 방식은 ‘고립과 사회화의 균형’이다.
그럴 수 있지, 그런가 보다, 사회는 원래 이런 거야, 저들이 정상범위에 있고, 내가 과잉이야 라며 넘긴다. 그렇게 넘겨대도 못 견디겠다 싶으면 철저한 고립상태로 들어간다. 동물이 겨울잠 자듯 스스로가 만든 동굴로 기어들어가 자극이 되는 것들을 끊어낸다. 적당히 거절도 하고 애써 무시하며 관계를 가벼이 한다. 과거에는 감정표출에 애를 먹었지만, 이제는 슬슬 뻔뻔해진다. 왜냐면 세상에는 뻔뻔한 녀석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또한 나를 아는 모든 이에게 좋은 인간, 의미 있는 인간으로 남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니 가능해진 일이다.
나는 관계에 진심이었다. 늘 그게 독이었다. 모든 관계가 헤비 했다. 라이트한 관계가 8이고 적당히 헤비한 게 2여야 하는데, 열이면 열 전부 진심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멘탈에 가해지는 데미지가 컸다. 나와 엮인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모두의 말에 경청하며 진심으로 대했고 그 모든 관계가 특별하다 여겼다. 쥐뿔도 없는 주제에 남의 형편을 걱정했고, 중재자라도 된 양 상황을 정리하고 수습하려 들었다. 누가 시킨 게 아니고 그냥 지능 낮은 내가 자청한 일이었다. 주제파악을 못하는 멍청이였다. 바보였고 나잇값 못하는 삶이었다. 그러면서 남을 탓하고 인간사회를 혐오했다. 내가 쏟은 만큼 돌아오지 않는 것에 실망하고 또 실망했다.
그렇게 살아오다 서른을 넘기면서 싫음을 넘어 혐오하던 것이 그냥 좀 별로인 것으로 그 정도가 완화됨을 느꼈다. 뚝 부러질 것 같은 것이 좀 흐물 해지는 것으로, 바람은 왼편에서도 불 수 있고 오른편에서도 불어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마음에 물을 많이 먹였더니 전보다 말랑해졌다.
나는 말랑한 찰흙이다. 내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걸핏하면 모양이 달라진다. 날 선 모서리의 세모가 되기도 하고,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오목한 그릇이 되기도 한다. 이제는 단단한 마음을 갖고 싶다. 상대에 맞게 수시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커스텀메이드를 만들고 싶다. 각자의 형태를 보존하며 조화로울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