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영화리뷰

영화<박쥐> 에세이편

어릴적 우리는 모두 교실에서 똥을 참았다.

by 대상c


중학교든 초등학교든, 우리 모두의 기억 어딘가엔

바지에 똥을 싸고 별명이 똥쟁이가 된 친구의 얼굴이 남아 있다.

내 친구의 별명도 그랬다. 바똥.

우리는 바똥을 바똥이라고 놀렸다.


바똥은 체념한 듯 낄낄거리거나, 화가 나지 않은 척 낄낄거렸다.

바똥도, 우리도, 모두가 낄낄거렸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의 웃음은, 웃음이 아니라 공포의 표정이었다.


나는 바똥이어서는 안 된다는 공포.

경멸되기보다는 희화화되겠다는 결심.

‘똥’은 어린 시절 가장 원초적인 금기였다.

냄새나고, 더럽고, 부끄러운 것의 상징이었다.





똥은 그렇게 금기가 되어간다.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학습된 배변교육은,

학교에서는 똥을 누지 못하는 아이들을 키워낸다.


우리는 똥이 금기가 되고, 죄가 되는 세상을 산다.

똥으로 시작된 금기는 아이가 자라며 차츰 더 교묘해진다.

우리는 더 이상 똥을 싸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교복을 벗은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강의실을 나가며, 휴지를 챙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 대신, 우리들은 배부름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마른 것이 예쁘다는 관념.

살찐 것은 건강하지 않다는 상식.

살이 찌는 것도,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늦은 밤 교촌허니콤보에 엽기떡볶이를 시키는 일도—

이제는 모두 ‘관리 실패’라는 이름의 낙인이 된다.




거식증을 앓고 있는 친구가 있다.

나이가 그렇게 어리지도 않다.

BMI는 14.


음식을 먹으면 죄책감이 밀려온다.

그녀는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토해버린다.

거식증이라는 질환명이 붙을 즈음이면, 손가락도 필요 없다.


변기 앞에서 허리만 새초롬히 숙여도 위장은 손쉽게 비워진다.

그녀는 아주 말랐다.


그녀는 요즘, 거울 앞에 오래 선다.

어깨는 뾰족하고, 발목은 손목보다 가늘다.

냉장고 문은 한숨과 함께 열리고 닫힌다.


“그만 먹어, 살쪄.”


거울 속 몸이 작아질수록, 눈빛은 흐려졌다.
줄어드는 건 살이 아니라 무언가 더 깊은 것 같았다.




그녀의 가슴 아픈 모습은, 얇아진 팔다리가 아니다.

사람이 먹고 자고 똥을 누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데.


어릴 적에는 똥을 싼다고 놀리더니,

이제는 먹는 것까지도 뭐라한다.

이러다가는 잠잔다고도 뭐라고 하겠다.

(학창 시절에는 수면마저도 금지당한다.)


살아가는 일이 죄가 된다.

우리는 모두 죄책감을 안고 산다.

그 당연한 것들을 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부끄럽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일들이

곧 자기 혐오의 근거가 되는 이 사회가.




영화 〈박쥐〉의 주인공 상현은 피를 마셔야 산다.


그에게도 먹고사는 일이 죄책감이 된다.

먹고 싶다는 욕망과, 먹으면 안 된다는 죄책감 사이에서 그는 괴로워한다.

그의 흡혈의 욕구는 태주라는 여성으로 태어난다.


태주는 아름답고, 욕망에 솔직하다.

신부였던 상현은 태주라는 여성을 성애한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그가 사랑하는 태주는 죄악이다.

이제 그에게는 생존도, 사랑도 죄악이다.

그는 태주와 함께 불타올라 정화되기를 결심한다.




영화의 메시지가—

아무렴 "죄를 지었으니 태주도 상현도 불태워 죽여버리자"일 리는 없다.



죄짓지 않아도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그 억울함이, 우리의 원죄다.

그 죄책감을 극복하는 일은,


죄의식마저 나의 한 부분임을 알고 사랑해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인듯 싶다.





나는 영화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살아 있다는 것,


먹고 숨 쉬고 욕망하고 배설한다는 것이

왜 이렇게 수치스러운 일이 되었을까.

그 죄책감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그것은 사회가 만들어낸 구조의 산물이 아닐까.

사회를 원망해야 할까? 혁명해버릴까?


아닌가, 내 탓인가?

나를 미워한 건 그냥 나인 걸까.


내가 나를 미워해야만 하도록 만든 구조 안에서,

아무 의심 없이 나를 미워해 온 내 자신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을까.


나는 피해자인것같지만, 가해자인양 죄책감을 안고.

대답은 없고, 질문만 남는다.


연락도 없이 너를 글감으로 삼아 미안하다, 친구야.


바똥.

잘 지내고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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