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틀 악마씨가 기획 진행 출연 시청하는 나이트오울 버라이어티쑈!
영화 <악마와의 토크쇼>는 삶과 미디어, 존재와 서사를 뒤섞어 만든 지옥의 버라이어티쇼다.
이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얼마나 통제되고, 연출되며, 관음되고, 소비되는지를 런타임 내내 직언한다.
출연자들이 계속 카메라를 응시한다. 우리는 그 시선을통해 버라이티쇼의 참여자가된다.
삶은 희극이고 비극이며, 리얼리티이자 연기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버라이어티쇼여야만 했다.
그렇다면 이 버라이어티쇼는 누가 기획하고, 누가 진행하며, 누가 편집하고, 누가 클로즈업하는걸까.
신일까. 악마일까. 사람일까.
크리스투는 이 영화의 전반부를 맡는다.
Christ. 그는 구원자이고, 허언자이기도 하다.
이적을 행하고, 타인의 고통을 들어주고, 이해해준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쇼의 형태로 관음되고 소비된다.
그는 사기꾼일까, 영능력자일까.
그의 능력은 죽음으로 증명된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으로 다시 살아난다.
하지만 그는 영화의 런타임 내에서 되살아나지 못한다.
영화는 그의 부활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의 중반 이후, 악마는 직접 등장하기 시작한다.
크리스투가 죽고, 릴리의 목소리가 변하고, 피부에는 트러블이 생긴다.
의자는 공중부양한다.
사실과 허구는 뒤섞이고, 현실은 흐려진다.
허구를 증명해줄 수 있는 건 카메라다.
카메라의 정직한 시선만이 우리를 허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야 했다.
하지만 이 쇼에서 카메라는 오히려 우리에게 최면을 거는 장치가 된다.
쇼가 과열되는 순간, 진행자는 쇼를 멈추고 광고를 삽입한다.
그리고 그 광고가 흐르는 몇 분 남짓한 시간만이,
쇼 바깥에서 출연진들이 의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틈이다.
흑백 장면은 현실보다 꿈같고, 찰나 같다.
지금이라는 무대 위로 실재가 밀려 올라오는 순간이다.
출연진도, 관객도, 영화의 시청자도 그 시간만큼은 각본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시간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순간이다.
쇼를 계속할 것인가. 멈출 것인가.
티비를 끌 것인가.
놀라운 사실은, 쇼가 끝난 이후에도 카메라는 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가 죽고, 각본이 무너지고, 무대가 사라진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영화를 보고 있다.
카메라가 사라진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이 시선은 누구의 것인가.
쇼가 중단된 지점에서의 카메라맨은 누구였는가.
그것이 사회의 시선이고, 타자의 시선이다.
영화의 결말을 본 우리는, 이미 이 쇼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본 시점에서, 우리는 이미 시나리오의 패배자들이다.
결말을 알기 위해선 이 시나리오를 끝까지 따라가야 한다.
최면에 빠진 뒤에야, 그것이 최면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을 살아봐야,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쇼에서 벗어나야 한다.
티비를 꺼야 한다.
꿈꾸는 자는 깨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