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권의 책을 읽고
독서하기 좋은 계절이다. 날이 추우니 어딜 나가기도 조심스럽고, 소파 옆에 책을 잔뜩 쌓아 올려놓고 하나씩 빼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러 장르의 책을 섞고 그날의 마음이, 눈이, 손이 가는 책을 선택한다. 여유를 두고 읽으니 일주일에 한 권 정도 보는 것 같다. 지난 3주간 읽은 책들을 간단히 소개하고 싶다.
1. 여행하는 말들(다와다 요코)
저자는 도쿄에서 태어나 일본 대학에서 러시아문학과를 졸업했고, 이후 독일 대학과 스위스 대학에서 독일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부터 독일에서 살며 독일어로 글을 쓰는 일본인.
간단한 소개에도 '글로벌'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모어가 일본어인, 이중언어자인 작가가 엑소포니(모어 바깥으로 나간 상태 일반, 또는 모어가 아닌 언어로 쓴 문학) 작가로 활동하며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을 글로 엮었다.
- 작가라는 직업인이 다중 언어를 습득하였을 때, 너무 큰 이점이 있는 것을 본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 모어 바깥으로 나가는 엑소포니를 경험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책의 저자는 다중언어를 통하여 모어 바깥을 여행하며 언어가 갖는 다양한 힘을 경험한다. 모어 바깥으로 나가야 진정한 모어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는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또한 외국어를 통해 문학 작품을 쓴다는 것은 내국인 작가보다 더욱 창의적인 표현이 가능하다고 한다. 나도 모르게 구조화된 언어의 틀에 갇혀, 언어의 넓은 세계를 다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언어든, 다른 무엇이든 한 발 물러서서 바라봐야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외국어를 배우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든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하는데, 나이를 들어감에 배우고 싶은 것들이 폭풍처럼 몰려오는지 모르겠다.
2. 저에게 재능이 있나요?(김경욱)
소설가이자 대학에서 20년간 창작 수업을 하고 있는 저자의 에세이. 3개의 챕터로 나누어 대학에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며 경험한 내용과 생각, 인생과 글쓰기, 글 쓰는 여러 가지 노하우를 말한다.
- 신문에서 책에 대한 소개는 다른 파트보다 세심하게 읽는 편이다. 이를 통해 흥미가 있거나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은 휴대전화에 메모해 둔다. 책을 구매할 때나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할 때, 메모해 둔 책의 목록을 활용하는데, 이 책 또한 목록에 있었다. 아마도 글쓰기 실력 향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등단한 지 30년이 넘었지만 글 하나를 쓰는 것에 매우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작가의 모습에서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글을 대하는 진중한 태도를 배우게 되었다. 다양한 일상이 곧 글이 되고, 글을 쓰는데 가장 중요한 부위는 발바닥이라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발로 쓴다는 것은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돌아가는지 기억하며 쓴다는 것.
3.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패트릭 브링리)
가족(친형)의 죽음으로 고통 속에 웅크리고 있던 한 남자가, 미술관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슬픔을 극복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 여정을 섬세하게 그렸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한 저자는 매일 다른 전시실에서 여러 명작들과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된다. 예술 작품, 동료, 관람객을 통해 일상을 조금씩 회복해 나간다.
- 부끄럽지만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미술에는 문외한인 내가 국립중앙박물관의 로버트 리먼 특별전시를 보기 위해 사전 지식을 얻고자 함이었다. 내가 뉴욕을 언제 갈 수 있을까? 메트의 리먼 소장품들이 언제 다시 한국에 올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전시를 보러 가기 전, 제대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책을 읽고 난 후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깊은 감동을 얻게 되었고, 예술을 가까이하는 좋은 방법들을 배웠다.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형을 잃게 된 작가는 슬픔을 최대한 누르고 있음이 책의 곳곳에서 절제된 표현을 통해 보인다. 누르고 눌러 생긴 마음의 구멍들이 예술 작품들과 독대한 시간 동안 조금씩 채워져 간다. 결국 예술 작품 속 인물들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슬픔, 기쁨, 고민, 불안, 행복 등은 우리들의 그것과 같았다. 작가의 마음속 상처의 구멍이 메워져 가면서 관람객, 동료, 남은 가족들이 상처로 비어있던 공간을 채운다.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동료들, 각양각색의 관람객들, 가장 가까운 가족들로 예술과 일상의 의미를 하나씩 발견하는 것 같다.
신문 칼럼에서, 하버드의 미술사 교수인 제니퍼 로버츠는 첫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매우 힘든 과제를 주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고 한다. 그것은 한 작품을 3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는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처음에는 힘들어 하지만 나중에는 뜻깊은 경험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책의 저자는 작품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제지하는 것이 유일한 업무라고 설명하며, 긴 시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경비원이라는 직업에 크게 만족한다. 작품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작품을 공감하는 것이 의미 있다는 조언도 한다. 마치 작품에서 일상을 발견하고 감정을 공유하면서 자연스레 감상하는 사람에게 작품은 비로소 위로가 되는 느낌이다. 침잠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새로운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다른 직업에 도전하는 작가의 모습에서 완전히 회복된 이의 모습을 본다. 사람의 위로는 결국 사람인가? 그것이 동료나 관람객이 될 수 있고, 가족이 될 수 있고, 어쩌면 작품 속 주인공이나, 작품을 통해 만나는 예술가이거나.
조만간 국립중앙박물관에 갈 예정이다. 리먼 전시를 최대한 오랜 시간 관람할 것이다. 단 하나의 작품이라도 예술가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면, 내 마음속 감정이 꿈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