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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신익 Jan 20. 2019

[스포일러有] - <레토>

한 편의 꿈같은 그 시대의 생각들

  빅토르 최는 알면서도 생소한 인물이다. 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거나 세대가 올라가면 이름은 들어봤을 수 있지만 그에 대해 자세하게 아는 것은 없다. 러시아, 정확히는 구 소련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끼친 고려인 가수라는 것을 제외하면 전혀 아는 바가 없고 필자 역시 들어본 노래라고는 YB(윤도현 밴드)의 목소리와 연주로 들은 [혈액형]밖에 없다.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퀸이라는 소재 자체가 영화의 재미와 직결되는 것은 아닌가 하여 약간의 우려와 함께 극장으로 들어갔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레토>는 빅토르 최를 전혀 몰라도 되는 영화이며 빅토르 최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레토>는 빅토르 최와 그 주변 뮤지션들을 통해 그 시대를 바라보고 빠져보는 그런 영화이다.

※본 리뷰는 <레토>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단지 빅토르 최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영화가 각 인물에게 두는 비중과 의미는 영화의 의미와 직결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영화는 빅토르[유태오 분], 마이크[로만 빌릭 분], 그리고 나타샤[이리나 스타르셴바움 분]의 시선을 번갈아가며 빌려 진행하며 그 사이를 몇몇 가상의 인물로 추정되는 두 남자를 통해 채운다. 영화의 중심이 되는 세 축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보자. 앞서 말했듯 영화는 빅토르에 대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아마 그 이유를 찾자면 빅토르가 영화 내에서 가장 적게 변화하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안에서 빅토르는 가장 확고한 생각을 가진 인물로 그려지고 그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도전한다. 마이크를 찾아가고 노래를 하고 밴드를 이어나간다. 자기 노래를 바꾸지 말라고 하며 드러머가 공석일 땐 드럼 트랙이라도 틀고 공연하며 자신의 노래를 코믹송으로 소개하려는 동료들에게 작게나마 반항하기도 한다. 동료들의 지원 하에 빅토르는 점차 입지를 확고히 하지만 동시에 인물은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는 인물은 마이크와 나타샤다. 마이크는 빅토르의 등정으로 나타샤가 변화하자 겉돌게 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이크라는 인물이 갖는 태도나 생각이 변화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타샤에 대한 태도가 바뀌지만 그러면서도 나타샤를 있는 그 자체로 인정한다. 기본적으로 마이크는 비교적 당장의 현실에 안주하는 인물이다. 빅토르와 당시 뮤지션들과 마찬가지로 해외 뮤지션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이 있기에 굳이 영어로 자신의 노래를 녹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것인 나타샤가 변화하자 겉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타샤는 마이크와 빅토르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이루는 인물이면서도 동시에 관객의 시선에 가장 맞닿아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마이크가 떠나 비를 맞고 돌아온 그 날 밤을 굳이 나타샤의 시선으로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그 이유도, 영화의 마지막을 나타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빅토르의 등장으로 가장 내적으로 크게 변화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서 확장해 영화의 표현에 대해서도 반드시 언급을 해야 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영화의 표현은 뮤직비디오 장면들이다. 뮤직비디오 장면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등장하는데, 하나는 애니메이션이 덧대어 지는 방식이고 하나는 1.33 : 1에 가까운 컬러 필름 촬영분이 개입하는 방식이다.(물론 후자의 경우에도 무언가를 필기하는 듯한 애니메이션은 등장한다.) 후자의 경우 영화는 촬영분에 마치 펜으로 그린듯한 애니메이션을 덮어 비현실적인 느낌을 더한다. 기본적으로 시네마스코프 화면비보다 조금 더 가늘게 촬영됐지만 해당 표현이 더해지면서 시네마스코프 화면비를 완성하고 흑백의 영화에 색이 개입되는 방식 중 하나다. 기차에서의 [Psycho Killer], 전차에서의 [Passenger], 마이크 밴드의 공연이나 [Perfect Day] 등등 상당 부분의 트랙이 이렇게 연출되며 뮤지컬적인 느낌을 준다. 보는 맛을 더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연출이 일어나지 않은 일임을 극중 인물까지 동원해가며 강조한다. 열광하고 뛰어노는 마이크의 공연이 없던 일로 돌아가버리면서 지금의 공연 시스템에 안주하는 모습과 엄청난 감정적 변화를 겪고도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며 마이크라는 인물을 읽을 수 있지만 조금 더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당시의 시대이다.

  기차에서는 먼저 시비를 거는, 심지어 폭력까지 행사하는 기성 세대에 반항하지만 이내 없던 일이 되고 자유롭게 즐기는 공연이 없던 일이 된다. 후자의 방식, 컬러 필름이 등장하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주로 그들이 음악을 하는 데 있어 자유롭게 노래를 부르고 담배를 피고 교류하거나 외국의 뮤지션을 커버하는([All The Young Dudes]에 한해) 모습 등 그 당시의 소련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을 그려낸다.(그런 점에서 [Passenger]는 약간 예외이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기보단 일어나선 안될 일이라 봐야 하고 시대상과 직결되지 않으니) 이에 연결해서 바라보면 영화의 후반부, 필름으로 들어가버리는 인물의 이야기도 약간은 설명이 된다. 영화 초반부 바닷가에서 노는 장면과 이어서 생각해보면 필름으로 들어가버리는 인물은 자유를 향해 찾아 떠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이것이 돌아가는 필름, 그러니까 영화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과 바닷가를 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잠식당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이는 당시의 현실에서 선택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 롱테이크 숏에서 영화는 공연을 하는 빅토르, 이를 바라보다 퇴장하는 마이크, 그리고 그를 뒤로하고 빅토르의 공연에 박수를 보내는 숏으로 마무리가 된다. 빅토르와 마이크, 나타샤 모두 실존 인물이지만 빅토르와 마이크에게는 출생, 사망연도를 붙여주지만 나타샤에게는 붙여주지 않는다. 나타샤는 아직까지 생존해있는 인물이기도 하겠지만 앞서 말했듯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시선에 가장 맞닿아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나타샤의 시선에서 이뤄지는 빅토르와 마이크의 비교가 마지막 숏에서 절정에 달한다. 빅토르 역시 자유를 100%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기차에서 그는 동료들과 함께 '없던 일'의 일부가 되고 그의 생각은 무대에서 완전히 발현되지 못하며 극장에 의해 통제당한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새로운 자극이다. 점차 변화하지 않는 기성이 되어가는 인물(마이크)을 뒤로하고 새로운 자극에게 박수를 보내는 시선. 그것이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시선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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