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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신익 Aug 13. 2019

[스포일러有] 기억과 꿈이 만나는 지점을 향하여

<지구 최후의 밤> 리뷰

※본 포스팅은 <지구 최후의 밤>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비간 감독의 <지구 최후의 밤>은 절대 친절한 영화는 아니다. 복잡하게 얽힌 영화의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고 시적인 내레이션과 대사들로 정보를 전달하고 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하지만 유려한 촬영과 탁월한 감각으로 장면을 지배하는 음악, 이를 통해 영화가 주는 이미지들을 따라 앞서 제시한 정보들을 종합해 감상하다 보면 아름답기도, 애잔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 영화에 대한 비간 감독의 확고한 생각이 느껴지기도 한다. 필자 역시 이성적으로 영화의 내용을 100%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럴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이해하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 역시 쉽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영화는 두 개의 막으로 분리되어 있다. 1 막은 과거 운명적으로 만났던 완치원[탕웨이 분]을 회상하고 찾아 나서는 뤄홍우[황각 분]의 이야기이며 2 막은 뤄홍우의 꿈(혹은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1 막은 현실의 이야기고 2 막은 가상의 이야기다. 당연히 1막과 2막의 구조와 촬영 방식은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오프닝의 내레이션, 그리고 영화 중반에 나오는 내레이션을 명심하자. 오프닝에서는 꿈은 두둥실 떠다니는 느낌을 준다며 긍정적으로 묘사하지만 동시에 꿈을 꿀 때 내 몸이 수소로 된 것은 아닌지 늘 의심한다며 이성적인 의문을 제시한다. 영화의 중반에서는 기억은 그것이 확실한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지만 꿈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분명 기억과 꿈은 확연히 다르고 영화 역시 이를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그 둘의 유사하다는 여지를 남겨놓는다. 그리고 그 여지는 영화가 각 막을 담아내는 방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

  1 막은 뤄홍우가 겪은, 혹은 겪고 있는 일들이며 그 내용 역시 굉장히 현실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일들을 굉장히 몽환적으로 담아낸다. 현재 시점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촬영되었는데 카메라가 고정된 경우, 혹은 움직임이 적은 경우에는 패닝과 틸트가 적극적으로 사용되며 카메라가 움직이는 경우에는 자유롭게, 제3자의 시선으로 공간을 유영한다. 그 와중에 현재의 사건들을 담아낼 때는 과거 사건에 비해 비교적 많은 컷 수와 카메라의 움직임을 최소화, 단순화하여 그나마 현실적으로 보여주지만 과거의 사건들은 대부분 원 씬 원 컷으로 구성되었으며 한 층 더 과감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패닝, 틸트를 사용한다.(물론 현재의 장면들 중에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연출된 장면이 많다. 어디까지나 비교적) 특히 180도 뒤집히는 틸트를 하는 등 파격적으로 연출된 장면들도 있으며 장면 전환이 모호한 장면들이 있는가 하면 색감 역시 현재보다 과거가 비교적 더 화려하게 그려진다.(완치원의 옷, 사과를 먹을 때의 방, 달빛을 중심으로 한 밤 장면들, 동굴 등) 정도를 따지자면 과거와 현재, 시간에 따라서 조금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비현실적으로 촬영이 됐다. 이야기의 구조도 마찬가지. 과거와 현재가 번갈아가며 등장해 비교적 혼란스럽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막상 내용 자체는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영화는 촬영과 미장센, 그리고 서사 구조를 통해 몽환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반면 2 막은 전체가 원 테이크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 보니 시간순으로 정직하게 이야기가 벌어지며 카메라의 움직임 또한 고정된 카메라를 중심으로 패닝, 틸트를 자주 사용하던 1막과는 다르게 2 막은 대부분 인물의 뒤를 쫓거나 인물의 시점을 빌려 사건을 쫓아간다. 1막의 과감한 틸트와 같은, 비현실적인 카메라 움직임도 없다. 당구장이나 무대 뒤 대기 공간, 광장 등을 생각하면 색감이 단조롭다고 보긴 어렵지만 1막에 비한다면 덜 화려한 편이며 기본적으로 백열등, 불과 같은 주황색 빛과 어둠의 대조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영화의 공간이나 상황은 1막에 비해 상당히 비현실적인 편이다. 동굴 속에 혼자 사는 아이, 탁구를 대충 치고 동굴을 탈출시켜주고 간이 리프트(?)로 내려가자 나타나는 마을, 탁구채를 회전시키자 정말로 날아가는 상황과 급작스럽게 등장하는 미친 여자, 그리고 그에게 시계를 받아내는 뤄홍우, 마지막에 회전하는 집까지. 비현실적인 상황의 연속이지만 영화는 그저 인물이나 다른 피사체의 뒤를 따라가거나 인물의 시점을 빌려 사건을 따라가 사실적으로 담아낸다. 꿈이고 사건들 역시 비현실적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현실적이다.

  1 막과 2 막은 내용과 카메라의 시선이 불일치를 이룬다. 현실의 1 막은 비현실적으로 담았고 가상의 2 막은 현실적으로 담아냄으로써 각 막의 이야기가 가진 특징, 1막의 현실성과 2막의 비현실성을 깎아내리고 그 반대의 특징을 끌어올린다. 촬영과 연출을 통해 그 둘을 가능한 가깝게 그려내려는 것이다.

  이쯤에서 오프닝을 한 번 돌이켜보자. 가라오케 마이크를 시작으로 끊임없이 틸트를 하여 화려한 조명을 지나 모텔방으로 도착하는 이 장면은 기나긴 롱테이크로 촬영되었다. 분리된 공간(가라오케 - 모텔 방)을 하나의 테이크로 관통하는 이 장면은 오가는 대화로 유추해보면 1막의 시간대, 그중에서도 현재 시점의 이야기지만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몽환적으로 연출된 장면 중 하나다. 그러면서 영화는 갓 꿈이 깬 주인공을 오프닝에 등장시킴으로써 꿈과 기억이 가장 맞닿아 있는 상태로 시작한다.

  1막의 마무리 역시 이와 비슷하다. 1막에서 은근히 중요하게 등장하는 소재가 '영화'다. 완치원이 끌려간 상태에서도 영화는 많이 볼 수 있어 좋았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완치원과 뤄홍우가 영화관에서 데이트를 하기도 한다. 특히 완치원이 원하던 자몽을 먹으면서. 또한 뤄홍우가 줘홍위안을 암살하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 역시 배경이 영화관이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영화와 기억을 대조하는 대사를 넣음으로써 <지구 최후의 밤>은 영화와 꿈이 유사한 의미를 갖도록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1막 마무리, 사실상 꿈이나 다름없는 2막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이 영화관이 된 것이라 생각한다. 1막에서 꿈과 기억이 가장 맞닿아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2막의 내용은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적인 1막의 정보들을 기반으로 구성된다. 자몽, 붉은 머리일 것 같았던 어머니, 탁구를 가르쳐주고 싶은 아이, 갱도에서 사망한 백묘와 동물의 뼈를 연상케 하는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아이, 현실의 완치원과 비슷한 양상의 대화를 나누게 되는 카이전(심지어 그 의미는 카이리의 진주), 그리고 회전하는 집까지. 몽환적으로 전달된 1막의 정보들은 2막에 이르러서 실현된다. 특히 1막에서 대부분이 실현되지 못하거나 주인공을 떠나간 이미지들이 2막에서는 주인공에게 도달한다는 점에서 현실과 꿈의 영역을 확실하게 구분 짓는다. 하지만 영화는 영원(시계)과 순간(폭죽)을 동시에 등장시키면서 결국에는 순간의 이미지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회전하는 집)를 제시해놓고서도 그 이미지가 끝나감을 암시하며 마무리하는 영화는 꿈속에서도 현실과 가장 맞닿아 있는 지점을 향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아름다운 영화이면서 굉장히 슬픈 영화다. 1막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 나선 뤄홍우는 극장이 도착해 그것들이 실현되는 2막으로 당도할 수 있다. 많은 것들이 순탄하게 해결되는 2 막은 마지막에 이르러서 그것들이 가지는 가치는 영원하지만(시계를 찬 카이전) 그 현상은 순간(거의 다 타들어간 폭죽)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프닝에서 꿨다고 하는 꿈 역시 이와 비슷할 것이고 감독이 보여주는 것은 그 꿈에 도달하고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한 사이클일 것이다. 마치 <달콤한 인생>의 선우[이병헌 분]가 말한, 달콤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계속해서 꾼다. 그렇게 영화는 기억과 꿈을 이어놓았고 그것이 순환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영화는 이 지점을 짚어내기 위해 내용과 담아내는 방식을 불일치시켜, 최대한 꿈과 기억이 맞닿도록 구성했다. 영화 자체가 화려하게 연출됐기 때문에 이 영화가 인상적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영화가 가지는 형식과 그토록 화려한 연출이 단지 겉멋이 아니라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확실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더더욱 인상적이다. 앞서 말했듯 절대로 친절한 방식의 영화는 아니지만 비간 감독은 자신의 생각을 확고하게 구현해냈다. 무엇보다 그 확고한 생각이 단지 생각 자체의 텍스트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화로써 온전하게 구현해냈다는 점에서 <지구 최후의 밤>은 정말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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