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 영화들의 반전에 대하여
※본 포스팅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화는 초반부에서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나아간다. 그것이 수사물이면 범인을 잡는 것이 목표일 것이고 복수극이면 복수가, 로맨스 영화면 주인공들의 사랑을 이루거나 깨는 것이 목표일 것이다. 당연히 관객들은 그 목표를 따라 영화에 이입하고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간다. 이야기의 특징에 따라 이를 공식화하여 정리된 것이 '장르'다. 서부극, 느와르, 공포, 코미디 등등. 대다수의 영화들이 이 공식을 바탕으로 하여, 혹은 조금씩 비틀어가며 만들어진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살인의 추억> - 형사 버디 영화, <괴물> - 괴수 영화, <마더> - 미스터리, 스릴러, <설국열차> - SF 액션, <옥자> - 어드벤처, <기생충> - 블랙코미디 등. 정확하게 장르 분류가 어렵더라도 우리가 어디서 본듯한 이야기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봉준호 감독 영화의 특징이다. 중요한 것은 봉준호 감독이 이 장르를 차용하되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대해서이다. 이미 '삑사리의 미학'으로 알려진, 장르의 변주는 유명하다. 예를 들면 <괴물>에서는 괴수 영화인데 괴물의 첫 등장이 대낮에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이뤄진다거나 뉴스를 틀었는데 원하는 정보가 나오지 않는 등. 자잘한 변주 등도 많고 이야기의 본 방향만큼이나 당시 상황을 주목하는 데 주력하는 봉준호 감독의 특징들도 이미 유명하다. 이번에 소개할 특징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이 특징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봉준호 감독 영화의 '이야기'가 갖는 '방향'이 독특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 특징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전부 반전을 포함한다. <살인의 추억>의 이야기는 범인 검거를 향해 나아가고 실제로 검거 직전의 순간까지 가지만 허망하게도 용의자는 범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괴물>은 딸을 납치한 괴물에게서 딸을 구조하고자 하지만 정작 그 딸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다. <마더>에서 엄마[김혜자 분]는 아들[원빈 분]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지만 결국 증명해낸 것은 아들이 진범이라는 사실이다. <설국열차>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는 혁명의 리더가 되어 머리칸까지 전진하는 데 성공하지만 이 혁명마저도 숙적으로 삼던 윌포드[에드 해리스 분]가 자신의 멘토 격인 길리엄[존 허트 분]와 함께 설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옥자>의 미자[안서현 분]는 거대 기업을 상대로 옥자를 되찾기 위한 거대한 모험을 벌이지만 결국 철저히 자본주의의 논리에 굴복하여 기업과 거래를 하고 옥자를 데려온다. <기생충>의 가족들은 신분 상승을 위해 일종의 전문적인 계획으로 박 사장[이선균 분]의 집에 입성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 뒤에 등장한 불청객으로 인해 모든 것이 어그러진다.
장르를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봉준호 감독의 뛰어난 실력과는 별개로 현대 영화에서 반전은 생각보다 흔한 요소가 되었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1995년작 <유주얼 서스펙트>와 1999년 개봉한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식스 센스>를 대표로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에서는 반전이 꽤나 흔한 요소가 되었고 타 영화들에서도 종종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는 이러한 반전을 단지 영화적인 장치로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에 사용한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느껴진다. 봉준호 영화의 반전을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반전의 내용, 그리고 반전 이후에 등장하는 것들에 있다고 생각한다.
<살인의 추억>에서 두만[송강호 분]과 태윤[김상경 분]은 현규[박해일 분]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관객에게 충격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잡지 못했다는 허망함을 전달하는 반전은 이후 등장하는 2003년의 두만의 평범한 모습과 연결되어 모두들 잊고 살지만 미제 사건임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영화는 모든 것이 변화하던 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오프닝에서 고장 난 자동차를 뒤로하고 트랙터를 타고 가던 두만은 2003년에 들어 멀쩡한 자동차를 타고 등장한다. 두만의 상황, 직업을 비롯해 그렇게 많은 것이 변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고 그것은 잊혀지고 있었다. 그리고 봉준호 감독은 마지막 씬을 통해 이를 현재로 가져온다. 이것이 봉준호 감독이 80년대를, 그 시대의 어설픔과 상처를 기억하는 방식일 것이다.
<괴물>에서 가족들은 현서[고아성 분]를 구출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하고 결국 현서에게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하지만 정작 현서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다. 보통이라면 '괴물과의 사투 - 구출'로 이어지는 게 괴수 영화의 구조지만 <괴물>은 역순으로 현서(의 시신)를 구출하고 괴물과의 사투로 이어진다. 결국 괴물을 잡는 데는 성공하지만 영화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한다. 하지만 영화는 현서를 잃은 절망을 현서와 함께 갇혀 있던 세주[이동호 분]를 통해 찾는다. 세주와 함께 살아가는 강두[송강호 분]는 이전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다시 가족을 이뤄 일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이 부분이 봉준호 감독이 생각하는, 상처를 안고서도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마더>는 어떠한가. 이미 아들이 범인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큰 반전이지만 영화는 그 이후의 행동을 통해 영화의 주제를 확실하게 한다. 봉준호 감독이 개봉 전부터 숱하게 얘기했듯 이 영화는 뒤틀린 모성에 대한 이야기다. 반전 이후, 엄마는 다른 지체장애자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워 도준을 무죄로 만든다. 일말의 죄책감은 있어 보이지만 영화 속 엄마는 다시 자연스럽게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관광버스의 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설국열차> 역시 반전 이후의 선택이 중요한 영화다. 모든 것이 자신들의 리더(길리엄)와 적의 리더(윌포드)의 설계임을 안 커티스는 여기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자신도 그 시스템의 일부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갈아엎을 것인가. 열차의 앞과 뒤라는 이분법적인 방향성에서 커티스는 열차의 밑을 보게 되고 열차의 옆을 향하여 이 체계를 뒤엎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의견은 분분하지만 감독에 의도한 바에 따르면 이 선택에도 희망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옥자>는 대기업을 상대로 한 미자와 ALF의 모험을 다룬, 일종의 언더독의 어드벤처이다.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것 같던 이 모험은 쌍둥이 미란도[틸다 스윈튼 분]의 등장으로 철저한 자본주의의 벽에 가로막히게 된다. 그리고 지극히 현실적인 영역으로 영화는 돌아간다. 잔인하게 도살되는 공장에서 미자는 그들의 법칙을 선택해 옥자를 돌려받아 집으로 돌아온다. 수많은 돼지들을 뒤로 한 채.(물론 이는 쿠키 영상을 통해 좀 더 희망적인 내용을 보여준다.)
<기생충>은 이런 반전이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 중 가장 일찍 등장하는 영화이며 유일하게 목표에 도달한 것으로 보이는 영화다. 네 가족의 목표, 신분 상승에 성공하지만 영화는 불청객을 통해 이를 철저히 깨부수며 그들 역시 기생충이었다는 결말을 향해 간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 중 가장 장르의 규칙에서 벗어나 있는 영화이긴 하지만 반대로 반전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이 가장 강하게 영화를 뒤흔드는 영화이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의 반전은 늘 영화의 목표를 좌절시키는 데 집중했다. 물론 다른 반전들도 마찬가지다.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사실 유력한 용의자가 범인이 아니다'가 그러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다른 영화들에서 반전은 보통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게 하거나 아니면 그 충격 자체로 영화의 마무리하도록 만든다. 앞서 언급한 반전을 예로 들면 범인을 추리하는 영화에서 '용의자가 사실 범인이 아니다'라고 했을 때 보통 영화는 새로운 범인을 잡으려 하거나 범인이 아니었음에 절망하며 마무리한다.(후자의 대표적인 예시가 <유주얼 서스펙트>와 <쏘우>)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은 유독 반전으로 인한 좌절 이후 선택을 중요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확장하거나 그 내용을 보강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반전 요소를 단순히 장르적인 변주로만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어쩌면 진짜 방점은 반전 그 자체가 아닌, 반전 그 이후에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반전이 유독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