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라이더>와 <해빙>
좋은 배우는 정말 많습니다. 좋은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하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영화가 아쉬워도 뛰어난 연기로 아쉬움을 덜어주는 작품도 있습니다. 배우는 인물을 담아내고 보는 사람들은 배우를 통해 영화 속 세상을 보기에 좋은 배우가 영화에서 가지는 존재감은 정말 상당합니다. 제임스 카메론은 "영화의 마법은 감독이나 작가가 아닌, 배우를 통해 완성된다."고까지 했습니다.(저게 정확히 맞는지는 모르겠네요)
최근 개봉한 두 한국 영화에서 활약한 뛰어난 배우들이 있습니다. <싱글라이더>의 이병헌과 <해빙>의 조진웅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두 배우가 각자의 작품에서 보여준 연기가 정 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두 영화 모두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연기를 보는 재미는 아주 뛰어났었죠. 이번에는 두 작품에서 두 배우가 보여준 상반된 연기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먼저 <싱글라이더>입니다. <싱글라이더>는 굉장히 정적이고 조용한 스타일의 영화입니다. 이병헌이 연기한 재훈이라는 캐릭터에게 많은 대사나 행동을 주지 않고 그 폭을 제한합니다. 의자에 앉아서 자사에 게시글을 쓰고 약을 먹고 비행기를 예매하는 과정을 대사 없이 배경음악 하나에 의존해 보여준다든지,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객들의 말을 듣다 간신히 꺼낸 "죄송합니다"가 채 나오기도 전에 대사가 끊긴다든지, 움직임이 있어도 걸어다니는 정도라든지. 애초에 외적으로 보여지는 요소가 굉장히 제한적입니다. 이병헌은 이 제한적인 요소속에서 오히려 멈춘 것 같은 순간들을 통해 재훈이라는 캐릭터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잠깐의 머뭇거림, 가만히 앉은 채 지은 무표정, 오랜 시간 부동 자세로 있다 자세를 바꾸는 등. 이병헌은 발산하기보다는 오히려 안으로 감정을 녹여내면서 작은 행동을 통해서도 감정을 아주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특히 무표정이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수만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눈빛이 아주 일품이며 이번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케이시 애플렉이 생각나는 연기였습니다. 당장 전작인 <마스터>에서는 많은 대사와 행동으로 캐릭터를 표현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병헌 개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상반된 연기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겠네요.
다시 <싱글라이더>로 넘어와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묵묵하게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면서 서서히 쌓이던 감정이 영화 후반부에 터지게 됩니다. 자신의 가족을 보며 오열하는 순간에까지 소리를 절제하게 되죠. 그 이후의 통곡은 차분차분 쌓아올린 감정을 발산하는 유일한 순간입니다. 이병헌의 연기가 여기서 중요한 이유는 타당한 감정의 누적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서럽고 크게 우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까지의 감정을 잘 간직했다가 터뜨리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병헌의 정적인 연기가 굉장히 좋았고 자신과 진아[안소희 분]가 죽었다는 걸 공개하는 순간보다 더 극적이고 아름다운 통곡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음은 <해빙>입니다. <해빙>은 특이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살인을 포함하고 있는 만큼 약간의 액션도 포함을 하고 있죠. 거기에 조진웅이 연기한 승훈은 정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어 실제와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기까지 합니다. 당장 영화의 구성도 승훈의 시선으로 본 초중반부와 진상을 설명하면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본 후반부로 나뉘죠. <싱글라이더>에서 이병헌이 보여준 연기가 캐릭터의 깊이의 문제였다면 조진웅은 다양한 폭의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담아내야 하는 넓이의 문제였습니다.
우선 직접적으로 비교되는, 다른 시선으로 다뤄지는 같은 사건들에서 조진웅의 상반된 연기만 생각해도 정말 놀랍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최고의 연기들은 취조실에서 스스로를 변론하며 벌어지는 연기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시선에서 본인은 소심하고 순진한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과격하고 공포스럽기도 한 모습을 가진 캐릭터가 승훈이죠. 취조실 씬들은 전자에서 후자로 변화하는 캐릭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게 됩니다. 특히 자신의 간호조무사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조진웅은 1분 남짓의 시간동안 캐릭터를 요약하는 것 같은, 그 넓은 스펙트럼을 한 달음에 담아냅니다. 비록 영화의 이야기가 어렵고 캐릭터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 없는 작품이며 승훈이란 캐릭터 자체도 아주 입체적인 캐릭터지만 그럼에도 승훈을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조진웅의 뛰어난 연기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분명 두 영화는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릴만한 작품이며 저도 100% 만족하지 않는 작품입니다. 오히려 <해빙>은 불만족에 훨씬 가까운 영화였죠. 하지만 두 작품을 하루 텀을 두고 관람한 것은 굉장히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배우가 보여준 연기로 인해 단 두편의 영화만을 봤을 뿐인데 수많은 캐릭터를 본 것 같은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싱글라이더>와 <해빙> 모두 올 해 최고의 작품이라 부를 수는 없겠지만 올 해 최고의 연기들을 담은 작품으로 나중에 기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