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주영이를 정말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2021년 1월의 겨울이었다. 저녁 7시까지 만나기로 한 약속에 주영이는 8시에 도착을 했다. 퇴근하기 직전 갑작스레 받은 업무로 야근을 하고 왔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천천히 오라니까 왜 뛰어오고 그래요" 주영이를 안심시키며 내가 말했다.
"정말 미안해요. 아니......"
"알아요. 윤 차장 그 사람은 오늘 하루종일 뭐 하다가 퇴근하니까 일을 준대요? 본인이 늦게 간다고 다른 사람도 늦게 가라 이건가? 너무 마음 쓰지 마요. 그리고 오늘 약속도 내가 오전에 갑자기 부른 거잖아요. 괜찮아요"
꽁꽁 얼은 그녀의 몸을 녹이기 위해 조명이 따뜻해 보이는 가게로 들어갔다. 음식에 대해 잘 모르는 나였기에 음식과 술은 모두 그녀가 고르도록 유도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사케가 따듯하게 데워진 작은 컵과 함께 나왔다. 나는 소주보다 사케를 더 좋아했다. 끝맛이 그리 쓰지않아 술을 잘 못하는 내게 안성맞춤이었다. 반면 그녀는 술에 약하지 않았다. 술을 가리는 편도 아니었다. 내가 소주를 권해도, 사케를 권해도 뭐든 좋아요 라는 표정으로 답했다.
"주영 씨는 언제 처음 서울로 올라왔어요?"
"저는 고등학생 때 처음 올라왔어요. 근데 보통 이 말하면 나오는 대답들이 좀 뻔하긴 해요. 어린 나이에 고생했겠다는 둥 외롭지는 않았냐는 둥 이런 말들이죠 뭐"
"이른 나이에 견딜게 많았네요"
"고등학생 때 정말 많이 울었어요. 가족들 보고 싶어서 울고, 친구들 보고 싶어서 울고, 피곤하고 힘들어서 울고. 그래서 일부러 방학 때도 안 내려갔어요. 갔다 오면 더 슬프니까. 근데 지금은 나 강해요! 씩씩하고!"
"저는 가끔 그렇게 생각해요. 사람이 어릴 때 되게 큰 슬픔을 겪고 나면 당시 어릴 적 체감했던 그 아픔이 너무나 크다 보니까 커서도 그 경험을 하면 아플 거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다시는 그때 그 감정을 겪지 않으려고 무단히 애를 써요. 제가 그렇거든요"
"대리님도 가족들이랑 떨어져 지냈어요?"
"아뇨. 전 가족들이랑 늘 같이 있었어요. 오히려 학생 때도 종종 부모님 일을 도우러 나갔다 보니까 지겹게도 오래 붙어있었죠. 그런데 늘 같이 있으면서도 떨어져 있는 기분이었어요. 가족이면서도 남인 것 같았고. 나를 아는 것 같으면서도 너무나 모르고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 가족들이 불편해졌어요. 가까운 사람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게 먼 관계도 아니죠. 싫어하는 사람들은 아닌데 그렇다고 그들을 좋아하진 않아요. 복잡하죠?"
"무슨 기분인지 알 것 같아요. 저는 오빠가 둘 있는데 사실 제 입으로 얘기하기 너무 민망한 얘기지만 오빠들이랑 친구들이 저보고 예쁘다는 얘기를 정말 많이 해줬었어요. 근데 그건 정말 제가 예뻐 보여서 하는 말 같았어요. 부모님들도 어딜 가나 제 자랑을 했는데 대부분 제 외모 자랑이었어요. 제 사진들 보여주면서 이게 우리 딸이다. 봐봐 되게 예쁘게 생겼지? 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어느 순간 방에 있는 거울을 보는데 제가 그렇게 못나 보일 수 없는 거예요. 사실 제 얼굴은 평소랑 그대로였을텐데 제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해야한다는 걸 넘어서 더 예뻐져야한다는 부담이 생긴거에요. 그 뒤로 매일같이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보는데 부족한 부분밖에 안보였어요. 저기는 왜 저렇게 생겼지, 여기는 이러면 좀 더 좋았을 텐데 하고요. 그러다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가족들도 내 주변사람들도 내가 예뻐서 나를 좋아해 주는 것 같은데 내가 예쁘지 않아도 그들은 여전히 나를 좋아해 줄까? 하고서 말이죠. 지금도 가끔 집에 내려가 엄마한테 와락 안기면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해요. 엄마는 나를 정말 사랑해서 안아주는 걸까?" 은은한 조명이 그녀의 눈을 더욱 반짝이게했다. 눈망울이 반짝이는지 눈물이 고인건지 내 시선에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10년도 더 지난 머나먼 그녀의 과거를 여행중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 시간 그 순간을 그녀는 세세하게 떠올리며 그 공간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가장 편해야할 가족들 앞에서 그들의 사랑이 변할까봐 가장 좋은 모습만 보이려했던거에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사랑을 못 받는 존재가 된다는 건 되게 슬픈 일이죠. 사람은 한평생 누군가에게는 꼭 사랑받고 살아야 하는 거 같아요. 사랑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취기도 올라왔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서로의 손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손을 잡고 싶다거나 그녀의 살과 닿고 싶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좁혀져 가는 나와 그녀의 정신적 거리를 더욱더 가까이하고 싶다는 마음만이 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순간 마음은 떨려왔고 그녀와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은 절실했다. 나는 오늘 고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말이 좋을까 고민했다. 괜히 술잔을 만지작 거리며 지금이 말할 타이밍이 맞기는 한 걸까 생각했다.
"오늘 해야겠다고 미리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데 고백을 해볼까 해요" 내가 말했다.
이른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외로움을 참아가며 씩씩하게 견뎠을 그녀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자니 그녀가 더 사랑스럽게 보였다. 누군가의 힘듦을 듣고 나면 그 사람에게 마음이 더 가고는 했다. 그녀를 통해 내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아픔을 투사하여 바라보았던 것인지 그녀의 이야기에 깊게 공감했기 때문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외로움과 슬픔의 무게를 너무나 잘 알았기에 그 감정이 두려워 꾹꾹 눌러 참았을 그녀를 곁에서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마음 편히 내게 기댈 수 있기를 바랐다. 세상 그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알아줄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내 고백을 듣고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내 손을 잡았다.
"좋네요. 이런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그렇게 담백하게 해주는 고백" 그녀가 말했다.
"난 섬세한 사람에게 마음이 많이 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오늘처럼 누군가 제 마음을 조심스레 다독여준 적도 없었어요. 어디 가서 요즘 바쁘다는 말도 못 했어요. 말해봐도 모를 테니까. 어떤 일 때문에 힘든지 설명해 주는 게 더 피곤하기도하고. 그런데 대리님은 제가 어떤 일 하는지 알고 얼마나 바쁜지 아니까 자세히 말 안 해도 알아주겠지 하는 기대가 언제부턴가 있었어요. 그래서 대리님이라면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은 제가 누구를 만날 상황은 아닌 것 같아요. 그 사람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요" 그녀가 덧붙였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납득되는 설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을 바꿀 수 없음을 알았다.
지금 사귀는 여자친구를 만난 건 2023년의 6월이었다. 나같이 좋은 나이에 왜 사람 안 사귀고 있냐며 평소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소개해준 친구였다. 나와는 동갑이었다. 선배 역시 주영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지난 2년간 선배의 귀가 닳도록 주영이 얘기를 했다. 물론 그 2년 사이에도 마음에 드는 이성이 몇 있었지만 만남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아무리 괜찮은 이성을 만나도 너무나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주영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주영이라는 사람은 내게 너무나 큰 존재로 그려져가고 있었다. 나라는 사람에게 딱 들어맞는 완벽한 퍼즐 조각으로 나는 주영이를 그리고 있었다.
헷갈리는 순간들도 많았다. 현 부서의 전반적인 업무를 혼자 맡고 있기에 얼마나 바쁜지는 알지만 내 연락에 더 이상 답장하지 않을 만큼인가? 하는 의문이 종종 들고는 했다.
"바쁘고 힘들어도 마음에 들면 다 연락해. 바빠서 연락 못하는 게 어딨어" 선배가 말했다.
"바쁜 것도 바쁜 거지만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요"
"너는 어떻게든 기다려보고 싶은 거구나?"
주영이의 마음을 애써 이해하고 기다려보려는 나와 이제 그만 그녀를 잊고 누군가를 만났으면 하는 선배였다. 이렇게 이 주제로만 2년을 대화했다. 그렇게 2년이 흘렀을 무렵 나는 선배가 소개해준 사람을 만나보기로 했다. 더 이상 나 자신을 설득할 합리화가 고갈되었고, 이 그리움의 끝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안될 인연임을 비로소 깨닫는 그 순간 찾아올 힘듦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누군가로 마음의 공백을 채워가야 했다. 그녀를 잊을 누군가가 필요했다. 필연적으로 다가올 힘듦을 나는 피해야만 했다. 이것이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었다.
주영이와는 달리 지금 여자친구와는 큰 어려움 없이 연인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 만남이 끝나갈 무렵 서로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두 번째 만남에서 그녀가 내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 번째에서 세 번째 만남까지는 3주의 텀이 있었다. 그 3주간 주고받은 연락에서 더 이상 미룰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 세 번째 만남에서 우리는 사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