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아이로 살아가던 나에게
착하다는 말을 들을 때면 입버릇처럼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저 별로 안착해요, 라고 정말 이렇게 믿으며 말했다. 내가 얼마나 짜증도 많이 내고 예민한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 하는 거예요.
입 밖으로 “저 안착해요”라고 말하며 그 사람에게 내가 착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동시에 나 스스로에게도 나는 착하지 않다고 되새기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사실 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으로 스스로에게 반문할때도 있습니다. 집에서만 봐도 부모님에게 툴툴대고 자주 짜증도 내는데 내가 착한 사람이 맞을까? 그런 것 같기도 하면서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무언가 설득력 있는 강한 근거가 있으면 확실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 번은 부모님이 저에게 회사 오후 반차를 신청하고 같이 은행을 가자고 부탁했습니다. 직장 생활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은 반차, 월차가 얼마나 귀한지 알 텐데 그 반차를 부모님 은행 업무 때문에 쓰라는 건가?
그리고 심지어 은행 직원도 있는데 무슨 도움이 필요하길래 은행 업무에 나를 불러다 쓰는가?
“안돼” 단호하고 짧은 대답을 건넸다.
‘싫어’는 해줄 수는 있지만 내가 싫기 때문인 속마음이 그대로 들킬까봐 내 의사와는 별개로 상황상 여의치 않다는 느낌을 주고자 ‘안돼’라고 답한 나름 계산된 답변이었다. 하지만 꽤나 중요한 일이었나 보다 ‘이를 어쩌지’하는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는 부모님의 표정을 뒤로하고 그 자리를 떴다.
그날 저녁 부모님이 내게 요청한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뜻은 완강했다.
"내 인생이야. 내 시간이고, 내 선택이야. 결정은 내 몫이야!"
나의 단호한 태도와 확고한 의지에 스스로에게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이윽고 찝찝한 마음에 왜 해줄 수 없는지 부모님에게 설명하러 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다름 아닌 부모님이 느낄 서운함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내게 부탁한 그 요청에 대한 짜증과 어이없음은 금세 사라지고 이제 부모님이 느낄 서운함과 아쉬움이 내게 더 크게 스며든 것이다. 그리고 그걸 해소해 주고자 이렇게 부모님에게 왜 같이 가줄 수 없는지 설명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착한 아이이다.
내 마음보다 그들의 마음이 더 신경 쓰였고 나의 이런 단호하고 선긋는 태도에 그들이 나에 대한 기대가
사라질까 봐. 나를 놓아버릴까 봐. 달래주게 되었던 것이다.
더 이상 착한 아이가 아니라 그냥 ‘나’이고 싶다면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
내가 불편하고 싫다면 내게 부탁하더라도 거절해도 된다. 정중하게 거절하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들도 할 수 있다.
나의 일, 그들의 일 확실히 구분 지어주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날 수 있을 때 착한 아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