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믿는다는 것은

이토 아사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를 읽고

by 유영하는유령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이토 아사, 에쎄, 2016)


눈을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인식할 수 있을까?


이 책에 의하면 공간을 인식할 때, 비시각장애인은 주로 시각적인 정보에 의존하여 2차원으로 인식하는 반면, 시각장애인은 시각 외의 다른 감각을 활용하여 3차원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달을 떠올릴 때 비시각장애인은 납작한 동그라미 모양을 떠올리는데 시각장애인은 입체적인 구를 떠올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이나 뒤, 안과 밖 등의 시점에 의한 구분도 시각장애인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고 한다. 시점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각장애인이 비시각장애인에 비해 촉각이나 청각이 더 발달한다고 말하는 것은 편견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필요한 정보를 수집할 때 어떤 감각을 사용하는지, 그 방식이 다를 뿐이다. 어떤 의자는 다리가 4개이지만 어떤 것은 3개인, 그 정도의 차이인 것이다.



그 외에도 저자가 지적한 시각장애인에 대한 흔한 편견*을 죄다 가지고 있었던 독자로서 이 책은 세상을 아예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든 흥미로운 책이었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이라면 대개 점자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조사 결과 실제로는 10명 중 1명 정도가 읽을 수 있다고 한다. 2006년 일본 후생노동성 조사에 의한 일본 시각장애인의 점자 인식률 12.6%. 85쪽.)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그 색깔의 사물을 기억함으로써 색의 개념을 이해한다. 예를 들어 빨간색은 사과, 딸기, 토마토, 입술에 해당되고, ‘따뜻한 색‘인 노란색은 바나나, 신호등, 달걀에 해당되며 ’경고’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혼색만큼은 아무리 애써도 이해가 안 간다고 한다. 물감의 색이 섞이는 것을 눈으로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빨간색과 노란색을 섞으면 오렌지색이 되는 것처럼 어러 색을 섞으면 다른 색이 되는 것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선천적으로 시각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에게 색을 섞는 것은 책상과 의자를 섞는 것과 같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64-65쪽)


위 발췌한 구절에서는 문화권에 따라 무지개의 색을 인식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와 비슷한 충격을 느꼈다.


이렇게 색을 어떤 개념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 혼색이란 어떤 개념과 개념이 뒤섞이는 것이 된다.

그 개념이 무엇인지는 아마 사람마다 다를 텐데, 누군가에게는 책상과 의자,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과와 경고, 혹은 신호등과 우울 같은 뒤섞임일 수도 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조합,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어떤 경계와 같은 것을 넘나들어 생각하는 행위 자체가 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알고 보면 어떤 것도 시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이든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확히 딱 떨어지거나 조금의 변화도 없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으니까.


최근 본 <유포리아>(HBO 드라마 시리즈)에 이런 대사가 나왔다.


“넌 시를 믿어야 해.”


약물중독으로 자기혐오에 빠진 주인공 루에게 스폰서 알리가 한 말이다.


“넌 시를 믿어야 해. 널 포함한 모든 건 언젠간 널 등지고 말 거거든.” (유포리아 스페셜 파트 1 1회)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다르듯, 관점이 달라지면 같은 것도 다르게 보인다.

여기에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보는 법을 배우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세상을 시적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시가 된다. 절대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던 높고 단단한 벽이 하늘을 향해 놓인 튼튼한 길로 바뀔 수도 있다.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조차 믿을 수 없을 때, 그런 때야말로 우리는 시를 믿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시를 믿는다는 건 아마도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관점을 바꾸면 생각보다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

익숙했던 세상이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 책에서 보여줬듯이.


조금 달라진 풍경을 바라보는 것.

그 풍경을 보는 나도 조금 다른 존재가 되어 조금 달라진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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