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타 사야카의 에세이를 읽고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 말 뒤에는 어떤 욕망이 있을까?
이 질문을 품게 된 계기는 무라타 사야카의 에세이였다.
<아 난 이런 어른이 될 운명이었던가>라는 제목의 에세이는 남의 눈을 의식하느라 끊임없이 갈등하는 일본의 평범한 ‘30대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인 무라타 사야카는 ‘나잇값 하는 물건’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관심도 없던 명품 가방을 사지만 막상 들려고 하니 어색해서 3년이나 그 가방을 묵혀두기도 하고, 조금씩 늘어가는 주름이 신경쓰여서 주변에는 가격을 차마 밝히기도 힘들 정도로 값비싼 크림을 사서 바르면서도 멋진 주름을 가진 사람을 동경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솔직하게 풀어낸다.
위에서 ‘30대 여성’에 따옴표를 붙인 이유는 글을 읽는 내내 저자가 ‘30대 여성’이라는 무언가를 열심히 연기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서다. 주변에서 말하는 ‘30대 여성은 이러이러한 것을 해야 한대’라는 잣대에 들어맞는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검열하는 사이 점차 미궁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나는 사실 주변에서 말하는 ‘나잇값 하는 물건’에 관심이 없는데…, 나는 가끔 혼자서 바에 가지만 칵테일 이름을 잘 알지 못해서 몰래 휴대폰으로 검색한 다음에 주문하는데… 등등. 사회에서 이상적으로 제시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먼 나 자신을 계속 의심한다. 이래도 되나? 나는 충분히 어른인가? 하고.
나이가 들면 기모노 차림에 피어싱을 한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아직 피어싱을 하지도 않았고, 어쩐지 쑥스러워서 기모노를 사놓고 입지도 못한다는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한편 답답함을 느꼈다. 하고 싶으면 지금 그냥 하면 되지.
그런데 문득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다가 거울을 본 순간, 사실은 나도 ‘멋진 할머니’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가능하면 지금 당장.
‘전신이 타투로 뒤덮인 할머니가 되고 싶다’거나, 무라타 사야카가 쓴 것처럼 ‘기모노 차림에 피어싱을 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게 아니라(나는 이미 몸에 타투가 있고 귀도 뚫었지만), 그저 단순히 나이가 많아지고 싶었다.
왜? 나이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으니까.
‘할머니’라는 단어에서는 어떤 모습이라도 괜찮을 것 같다는 편안함이랄까, 느긋함 같은 게 느껴진다. (그래서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말에서는 약간의 갑갑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꼬장꼬장하면 귀엽지 않은 건가? 귀엽다는 건 어떤 거지? 어디까지가 ‘귀여움’으로 허용되는 거지? 고민하는 동안 뭔가의 늪으로 빠지는 느낌)
반대로 말하면, 할머니가 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특정한 무언가를 수행해야 하고, 각 나이대에 맞는 행동양식을 따라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는 뜻이고 이 말인즉슨, 내가 그것에 압박을 느끼고 있는 상태이며,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거다.
논바이너리로 정체화 한 이후 성별 압박에 대해서는 그나마 조금 자유로워진 편이지만(그래서 ‘할머니’라는 말은 엄밀히 말하면 내 경우엔 들어맞지 않는다), 지금 내 나이대에 해야 할 일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부채감에는 남들 못지 않게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이런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떻게 보면 판타지에 가까운 희망이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말로 드러난 게 아닐까.
얼마전 우연히 물리학자 김상욱님이 죽음에 대해 말하는 동영상 클립을 봤다. (https://youtu.be/RYBpoLA_KyA) 이 영상에서 김상욱님은 이렇게 말한다. 원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죽은 상태로 있다가 우연히 모여 생명을 이루게 되는데,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던 원자도 그렇게 모여있다가 죽으면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원자는 영원불멸이므로 한때 우리의 몸이었던 원자는 다시 나무가 되거나 다른 존재의 일부가 되며, 그런 방식으로 사랑하는 존재들이 영생한다고 생각하면 조금 위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음, 좋은 내용이군, 하고 넘겼는데 며칠 뒤 다른 책을 읽던 중에 문득 이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마치 금방이라도 녹아서 흘러내릴 아이스크림처럼 느껴지는 밤이 있다”(<불안이 나를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리라>, 임이랑, 32쪽)라는 구절을 읽는 중이었다. 책에서는 이 구절이 자기혐오에 대해 말하는 맥락에서 쓰였지만, 읽고 있던 나는 오히려 갑자기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마침 창문으로 시원한 가을 바람이 불어와서인지도 모른다.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이 바람에 내 존재가 흩어져버리면 굉장히 기분이 좋을 것 같다고. 나라는 존재, 내 몸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언젠가 흩어질 텐데, 그렇게 되면 내가 몇 살이든, 무슨 생각을 했든, 뭘 했든 상관없는 것 아닌가.
무라타 사야카가 에세이에 쓴 것처럼, 칵테일 이름을 술술 꿰고 있는 어른은 멋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사람만 좋은 건 아니다. 칵테일이라곤 진토닉 정도밖에 몰라서 술을 주문하기 전에 매번 검색해야 하지만 술을 마시면서 속으로 “장래에 고양이를 키우면 붙이고 싶은 이름이라든가, 꿈에서 자주 가는 백화점 층별 가이드라든가, 만약 내가 <비밀전대 고레인저> 각본을 쓰게 되면 레드는 어떤 성격으로 하고, 다른 색은 어떤 성격으로 할지 등등”(위의 책, 무라타 사야카, 59쪽)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재밌어서 좋다.
그러니까 최소한의 지킬 것만 지키고 산다면, 나이가 몇이든, 뭘하든, 30대이지만 곶감 표면에 있는 얼룩이 곰팡이인지 아닌지도 구분하지 못해서 한참을 고민하는 나 같은 사람이라도, 상관없는 것 아닌가. 어차피 우리 모두 언젠간 흩어질 테니까.
나를 속박하고 있는 것이 사회가 만들어낸 고정관념이라면, 그것이 속박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를 흐트러뜨림으로써 그 속박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비대해진 자의식을 버리고 흩어짐으로써 자연의 일부가 되기…. 이건 그냥 뭐 거의 명상 고수 아닌지?
그러니까 너무 갑갑할 땐 한번씩 ‘헤쳐모여!’를 외치고 리셋하기,를 시도해보자고 마음먹어본다. 그러다 보면 집요하게 나를 따라오는 것 같던 ‘남의 시선’도 속일 수 있을지 모르니까. (어딜 보시나요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