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엉성하고 어설픈 첫 걸음을 위하여
카드를 또 잃어버렸다.
삼성페이를 쓰다 보니 지갑을 안 쓴 지가 몇 년이다. 일이 있을 때만 주머니에 덜렁 들고 다니다 보니 카드고 신분증이고 잃어버리는 게 연례행사가 되어버렸다. 작은 카드 지갑이라도 하나 사야겠다 싶어 검색을 시작한다. 자주 쓰지도 않을 거 아무거나 사면 좋을 텐데, 의미가 옅은 고민이 길게도 이어진다. 명품 지갑을 사기에는 돈이 아깝고, 그렇다고 싸구려 지갑은 내 나이가 조금 머쓱하고. 무언가 매력 있는 지갑을 사고 싶어 페이지를 휙휙 넘기다 보니, 뜨개질로 만든 카드 지갑이 눈에 들어온다.
뜨개질! 한때 나의 자유시간을 몽땅 흡수했던, 떠나보낸 취미 중 하나. 그해 겨울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목도리를 왕창 떠서 선물하곤 했었다. 갑자기 카드 지갑도 직접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튜브에 검색하니 다행히 어려워 보이지는 않아 바로 재료를 주문. 마음에 꼭 드는 도안이 없어 손 가는 대로 우선 만들어 보기로 한다.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대강 도안을 만들고는 서너 시간 떴다가 풀었다가 반복하다 보니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왔다. 안녕, 나의 카드지갑 프로토타입 1!
그럴듯한 줄 알았지만 역시나 여기저기 아쉬운 부분이 튀어나온다. 모서리 부분은 자꾸만 말려들어 가고 접었다 폈다 하는 부분은 애매하게 헐거워 카드를 뱉어내기 직전다. 이건 아무래도 못 쓰겠다. 반갑게 인사하자마자 미안, 그치만 이건 너의 정해진 운명이었어. 넌 프로토타입인걸!
나는 늘 이런 어설픈 첫걸음에 끝까지 매달리곤 했다. 음악을 만들 때도, 영상을 찍을 때도, 심지어 수업 자료를 만들 때까지도. 나름 열심히 했는데 기대에 영 못 미치는 이 결과물에 내가 어떤 마침표를 찍는 순간, 내 능력은 딱 이 정도다! 라고 세상에 공표하는 것 같았다. 아쉽고 애꿎은 손길이 덧대질수록 점점 산으로 가는 결과물을 보면서도 쏟아부은 시간이 아까워 버리지도 못하고 에너지만 낭비하곤 했다. 잘하고픈 욕심에 안달하다 보니 다음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적도 많았다.
그러다 프로토타입이라는 단어를 만났다. 아니, 철저하게 계획된 전략적인 실패라고? 이런 치트키를 왜 나만 몰랐을까! 처음부터 '이건 날려버릴 초기 버전'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해도 되는 거였다니. 그러면 과감하게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보며 빠르게 감을 잡을 수 있는 거잖아. 괜히 매달려서 고쳐보겠다고, 살려보겠다고 끙끙대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소중한 첫 작품? 화끈하게 공중분해 시켜버리고, 아쉬운 마음? 빠르게 털어버리고, 손에 감각이 살아있는 채로 빠르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잖아!
바로 두 번째 뜨개질을 시작한다. 실을 적당하게 당기는 힘이 한결 편안하게 손에 익었다. 아까 모자랐던 부분은 조금 더 넉넉하게, 느슨했던 부분은 조금 더 타이트하게 수정해 본다. 처음 보다 훨씬 빠른 시간 안에 두 번째 지갑이 완성된다. 여전히 흠잡을 곳이 눈에 띄지만, 훨씬 더 그럴듯하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당당하게 내가 만든 지갑이라고 꺼내 보여줄 수 있겠다 싶다. 다른 색으로 떠서 선물을 해 주고 싶은 사람들도 떠오른다. 만약 더 멋진 지갑을 만들 수 있게 된다면, 그 멋쟁이 지갑들은 어떤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곧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나의 카드지갑 프로토타입 1에 말이다. "네 덕분에 내가 태어났어!" 라고.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하지만 자신의 실패 앞에서, 어설픈 결과물에 시간과 노력이 날아가 버리는 그 순간 앞에서, 진심으로 반가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럴 때는 빠르게 스스로에게 "ㅇㅋ 방금은 프로토타입이었음!" 이라고 외쳐보자. 성장한 나를 만나고 싶다면, 먼저 어리숙한 나라는 초기 버전을 세상에 내보이고 부지런히 업데이트를 해야 하니까. 게다가 인생은 실전인걸. 프로토타입이 1에서 끝나면 다행이지, 두 번째 세 번째를 넘어 이어지는 실패들이 있을 것 아닌가. 그때마다 쿨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근사한 최종 작품을 빨리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까. 살아가면서 용기가 필요한 순간들이 참 많은데, 나는 이런 종류의 용기가 가장 간절하다. 나의 서투름을 마주할 용기. 흑역사를 만들고 망가지더라도 나아갈 용기. 프로토타입을 웃으며 버릴 수 있는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