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월급은 카드값으로 사라졌고,
그다음 달엔 월급조차 없었다.
잔고는 대략 10만원.
내 비상금이라서 쓸 수 없는 돈이나 마찬가지였다.
밥은 집에서 차려먹으면 됐고,
뭐라도 해야 했는데,
솔직히... 좀 더 쉬고 싶었다.
게으른 것도 맞았고, 무서운 것도 맞았다.
솔직히, 그냥 좀 더 쉬고 싶었다.
그러던 중, 신용카드 연체문자와 전화가 며칠내내 오기 시작했다.
난 갚겠다고 대답했으나, 딱히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며칠 후, 엄마가 웬일로 퇴근하셔서 친구들과 함께가 아닌 혼자 들어오시더니 내게 씩씩 거렸다.
그렇다. 카드가 정지 된 것이다.
엄마가 망신을 당했다며 카드가 어떻게 된거냐
네가 일부러 정지시킨거냐며 화내셨다.
덤덤히 말했다.
"돈이 없어. 나 일도 안하는데 돈이 어디서나."
내 대답에 엄마가 말문이 막힌 듯,
짐시 가만계시더니, 더 화를 내셨다.
나가서 마트 알바라도 뛰어!!!!
어? 잠깐 마트 알바? 괜찮아보였다.
딱히 꿈도 없고, 일단 숨은 쉬어야 하니까.
아르바이트 구인 게시판을 보던 중에,
집에서 가까운 대형 마트 계산원 공고가 떴다.
그냥 클릭해서 지원하고,
며칠 뒤 면접을 본 후에 바로 일 할 수 있었다.
처음엔 계산대가 좀 무서웠다.
기계 조작이 서툴러서 손님이 줄을 서면 식은땀이 났다.
그런데 며칠 지나니 손이 먼저 움직였다.
일은 단순했다. 서 있느라 다리는 아팠지만,
시간은 빨리 갔다.
무엇보다 마트의 힘찬 음악과, 분주하게 움직이고 소리치는 사람들을 보니,
제대로 된 세상에서 일 하는 것 같았다.
밤에는 이력서를 다시 꺼내 들었다.
뭐라도 해야하니까.
경력란을 채우다 말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무슨 일 했더라?”
내가 했던 일,
청소, 커피타기, 영수증 풀칠, 우체국....
그게 일인가?
일이긴 했나?
일단, 부가세 마감 경험을 한 줄로 우겨 넣었다.
그러고는 자소설을 다듬었다.
그렇게 며칠을 흘려보냈다.
이력서엔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았다.
몇 주가 흐르고, 카드 정지가 돼서 엄마가 더이상 쓰지않아서인지 카드값 모두를 갚을 수 있었다.
약간 모자란 금액은 엄마가 말없이 보태줘서
가능했다.
신용등급은 아주 많이 떨어졌겠지만,
희한하게 신경쓰이지 않았다.
엄마가 가지고 있는 카드는 분실신고를 했고,
재발급 된 카드는 집이 아닌 마트에서 수령하기로 했다.
돌고돌아 이제야 원점으로 돌아왔지만,
이게 또 다른 출발선일지는 아직 모르겠다.
왠지 모르겠다.
술을 먹고 이력서를 썼다.
이력서 작성을 다 한것도 모자라
여러군데 이력서도 넣었다.
술이란 참 내가 맨정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마트 알바가 끝나고 늦은 오후 집에 가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한 통 왔다.
이력서 낸 곳 중에 한 곳이었고
면접 요청 전화였다.
날짜와 시간을 마트 알바와 안겹치는 선에서
적당히 잡았다.
면접 날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스커트에 블라우스를 차려입고
갔겠지만,
이번엔 마트 알바를 마친 복장 그대로
그 사무실로 갔다.
단정하기만하면 되지 뭐.
건물 복도는 싸늘했고,
전등은 너무 밝았고,
사무실 안쪽에서 들리는 익숙한 라디오소리.
문 앞에 서 있는데,
라디오 소리만 들리고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사무실 밑바닥부터 무겁게 깔린 침묵.
그 침묵을 가리는 듯이 더 신나게 들리는 하이톤의 라디오.
그때, 문이 열리고
실장이 나왔다.
웃고 있었지만 눈은 찬찬히 나를 살폈다.
인사를 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 문 연 선배 또래가 내게 묻지도 않고
커피를 가져다 줬다.
생각한대로 분위기는 똑같았다.
건조한 세무사의 말투,
입은 웃지만 여전히 눈은 웃지 않는 실장.
숨이 점점 막혔지만,
왠지 제대로 대답 안하고 도망가면
내가 회피하는 것을 넘어, 패배자가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면접을 보고
며칠 후, 면접 본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일부러 안받자, 최종합격 문자가 왔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꺼버렸다.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나서도,
내내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정말 이렇게 회피해도 되는 걸까.
지금이야 알바로 하루하루는 메울 수 있지만,
이걸로 돈을 모을 수는 있을까.
조금이라도, 나만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을까.
나중에 엄마 아빠 아프셔서
병원비가 많이 들면 어떡하지.
그땐 누구한테 손 벌리지 않고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다시 회사에 들어가는 게 무서워서,
지금 이렇게 숨은 채 살아도 되는 걸까.
다시 사회생활 못하면 어떡하지?
다시 출퇴근 지하철을 못타게 되면 어떡하지?
엄마 아빠한테 부끄러운 딸이 돼버리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들이 조용하고 깊숙이
머릿속에 가득찼지만,
아직은, 조금은 더, 도망 가 있어도 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마트로 도망가기로 했다.
그곳은 천국은 아니었지만, 지옥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