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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었어~!”
엄마 친구들의 인사에, 나도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 인사드렸다.
엄마는 웃으며 그들과 함께 현관으로 향했다.
나는… 말없이 거실 테이블로 갔다.
테이블 위엔 젓가락, 빈 접시, 쏟아진 국물.
이럴 줄 알았지.
손을 걷어붙였다.
천천히, 하나씩 치웠다.
기름 묻은 프라이팬, 반쯤 남은 전,
먹다 남긴 음식이 있는 접시.
닦고, 헹구고, 다시 닦았다.
라디오도 없고, 티브이도 없고, 음악도 없이
수돗물 소리만 방 안을 채웠다.
그때, 진동.
하필, 지금.
물기 묻은 손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엔 단 한 줄이 떠 있었다.
[○○노래방 78,000원 일시불]
“……하.”
숨이 길게 빠져나왔다.
손을 씻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다.
소주 한 병.
컵라면 하나.
이 집에서 가장 조용한 만찬.
라면 물이 끓는 동안,
나는 통장 앱을 켰다.
잔액 확인.
이체 예정 내역.
카드 결제일.
…안 돼. 지금 이 돈으로는 카드값을 못 낸다.
폰을 컵라면 옆에 내려놓고
그냥 앉아만 있었다.
먹어야 하는데,
안 넘어갈 것 같았다.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오히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멍한 상태에서,
내 손가락이 폰을 다시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드 결제 계좌를 잔액 0원인 통장으로 바꿨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지키고 싶었던 걸까.
포기하고 싶었던 걸까.
술이 들어가니
‘에라이, 모르겠다’가 — 돼버렸다.
어차피 카드값 결제일은
내 마지막 월급이 들어오는 날의 다음 날.
그러니까,
일단 냅둬 보기로 했다.
이래서 술이, 참 편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곧 다음 주.
카드값이 빠져나가는 날이
이제 정말 눈앞이다.
그동안 엄마는
매일 친구들과 함께 집에 들어왔다.
현관문이 열리고,
낯선 웃음소리가 들리면
나는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잃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엄마가 더는 큰 금액은 쓰지 않았다는 것.
몇 천 원, 많아야 만 원대.
편의점, 배달, 간단한 생필품.
카드 알림이 뜰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수치만 보면 견딜 수 있는 범위였다.
그런데도 불안은 줄지 않았다.
지금 남은 잔액에 마지막 월급이 들어오면,
이번 달은 아슬아슬하게 넘긴다.
문제는,
그다음 달에 결제해야 할 금액이
조금씩,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는 거다.
미루고 있는 카드값이
계속 쌓이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가장 잘 안다.
사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착각을
아직 놓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마지막 월급이 입금됐다.
어서 결제계좌로 옮겨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내게 남는 돈이 없어진다.
손가락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사이
카드 결제 문자,
연체 문자,
그리고 전화까지 오기 시작했다.
처음 받아보는 연체문자와 독촉전화는,
내가 억지로 구석에 몰아넣었던 불안감을
이전보다 더 크게, 어둠처럼 눈앞에 끌어올렸다.
눈앞이 깜깜했다. 이 말이다.
돈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야 했다.
텅텅 빈 계좌들만 있지만, 그래도 확인했다.
모든 포인트들을 확인해서 은행 포인트로 바꾸고
아껴서 쓰려고 모아둔 기프티콘도 모두 현금으로 바꿨다.
그리고 내가 칠칠치 못함을 바라며 겨울 잠바들 주머니를 다 뒤져봤다.
그놈의 천 원 한 장 안 나왔다.
끝까지 야속한 천 원이었다.
자, 이제 마지막 남은 희망. 돼지 저금통이다.
5백 원짜리들은 내가 넣는 대로 도로 빼서 써서 십 원짜리 백 원짜리밖에 없었다.
턱없이 부족하다. 내 월급을 지키기에는.
옷장, 서랍을 마구 뒤졌다.
당근에 팔 게 없나 눈 씻고 찾아봐도
제대로 된 옷 한 벌, 귀여운 인형 하나 갖고 있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 뛰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가진 유일한 쇠붙이에 눈이 갔다.
어쩌다가 엄마가 작다고 내게 준 14k 금반지.
냅다 들고 금은방 가서 팔았다.
5일 내내 불안감에 싸여 온 집안을 눈으로 훑었다.
창고도 뒤져봤지만, 오래되고 고장 나서 팔 수 없는 것들 뿐이었다.
누구에게 돈을 빌리고 싶었지만,
가장 힘든 선택지였기에 슬쩍 눈물이 났다.
이렇게 버티다가 결국 이번 달 카드값을 모두 냈다.
동시에 카드 결제 문자를 차단했다.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통장의 숫자를 눈으로 확인한 순간,
밥이 먹고 싶어졌다.
밥 한 끼도 챙겨 먹기 어려운 잔액이어서였을까.
아니면, 밥이라도 든든히 먹어야
다시 통장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아서였을까.
따뜻한 흰쌀밥이 먹고 싶어졌다.
쌀을 씻고,
압력솥에 물을 맞춰
불에 안쳤다.
중간중간,
진동이 울릴까 봐
나도 모르게 움찔움찔했지만,
압력솥 추가 움직이고
밥 냄새가 희미하게 퍼지자
나도 모르게
슬쩍 웃음이 났다.
문자가 없다는 게
이렇게 마음 편한 일이었구나.
밥의 불을 끄고,
선반에서 스팸을 꺼내 구웠다.
냉장고에서 김치도 꺼냈다.
고슬고슬한 밥.
국은 없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은 것 같았다.
내 허기졌던 뱃속도, 시달렸던 마음도
한 끼 밥에 든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