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사람이길 포기했더니, 그곳엔 내가 있었다. 上

by 김대리


이 일을 오래 해 온 선배들은 이렇게 말했다. "기장일은 정년이 없어. 경력만 쌓이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어."
그래서 나는 전산세무 자격증을 땄다.
적은 연봉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배운다는 마음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출근 첫날, 나는 새로 산 블라우스를 입고
집에서 무려 7시 반에 나섰다.
지각하면 안 된다는 마음에,
긴장 반, 설렘 반, 옷매무새 많이.

사무실엔 8시 반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불 꺼진 사무실 문 앞에서,
나는 잘못 온 줄 알고 몇 번을 회사명을 확인했다.

‘9시 전엔 문 열리겠지.’
건물 복도에 서서,
누군가 오면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계속 복도 모퉁이만 응시했다.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런데 9시가 돼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오늘 일요일인가?
날짜와 시간을 확인하고,
심지어 포털사이트 뉴스까지 클릭했다.

맞다. 오늘은 월요일 아침 9시.

결국 면접 때 봤던 세무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실장이 얘기 안 해줬나 보네. 우리 9시 반 출근이야.”

나는 다시 등신대처럼,
그 복도 모퉁이를 보며 서 있었다.


사무실 인원은 세무사, 실장, 선배 둘, 나까지 총 다섯이었다.

9시 25분쯤, 선배 한 분이 도착했다.
꾸벅 인사드리자, 선배는 고개만 까딱하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 뒤로 실장이 정확히 9시 29분에 도착했다.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손짓으로 나를 부르더니,
세무사에게 가서 인사드리라고 했다.
선배 둘에게도 인사를 드렸다.

내 자리는 회사 문과 가장 가까운 자리였다.
어색하게 앉아 있던 찰나, 아까 문을 열던 선배가 왔다.
“일단 일로 와서 이것부터 할래요?”

따라간 곳은, 사무실 바로 옆 남녀공용 화장실이었고, 구석에 걸려 있는 마대걸레를 내게 건넸다.

오자마자 내가 손댄 물건이 키보드나 마우스가 아니라 화장실 마대걸레라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 채로 청소를 끝내고 다시 자리에 앉자, 또 그 선배가 왔다.

“이리 와서 이것도 좀 할래요?”

이번엔 사무실 구석, 커피 테이블 앞이었다.
쌓여 있는 컵들을 선배는 챙겨서 화장실 세면대 앞으로 가져갔다.

“수세미는 여기, 퐁퐁은 여기.”

...정신없이 컵을 씻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라디오 소리가 크게 울렸다.
뉴스도 아니고, 클래식도 아니고,
신나는 광고 음악.
사람들은 각자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말이 없었고, 이상하게 밝은 배경음악이 흐르는 무표정한 공간은 나를 더 정신없게 만들었다.
말 없는 세무사 사무실, 신나는 라디오
그리고 화장실 청소와 설거지.

그때 세무사가 컵 하나를 가져가며 말했다. “앞으로 아침에 나한테 커피 한 잔 타서 가져다줘요. 오늘은 내가 타 마실게~”

“앗, 네네…”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반드시 매일 아침, 커피 한 잔씩 바치고야 말겠다는 듯이.

겨우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 전원을 누르자마자, 또 그 선배가 다가왔다. 왠지 모르게 순간 얼어붙었다.

“앞으로 문은 네가 열고 닫는 거야.” 열쇠를 쥐여줬다. ‘문 담당’이 된 것이다.

점심시간이 오기 전까지 복사기 트레이에 종이 채우는 법, 파쇄기 쓰는 법, 오는 전화받고 담당자에게 돌려주는 법까지 배웠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실장이 벌떡 일어났고 문을 열었던 그 선배도 조용히 일어났다. 그러자 다른 선배가 힐끗 나를 보더니 말했다. “같이 가요.”

"앗 네네.. "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

사무실에서 몇 걸음만 나가면 보이는 조그마한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엔 김치찌개, 제육볶음 같은 익숙한 점심 메뉴들.
선배들도 자연스럽게 김치찌개를 시켜 나도 따라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실장이 물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열심히 해. 연차 쌓이면 연봉도 오르고… 혹시 아나, 기장 업무 더 많이 맡게 되면 세무사님이 청소 알바라도 고용해 줄지.”

또 나는 "앗 네네.."

그 말 끝에 이어지는 선배들만의 대화.
“○○ 업체 진상이던데?”
“거기 진짜 이상하긴 해.”

나는 조용히 김치찌개를 떠먹었다.
사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고 먹었다.

점심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실장이 나를 불렀다.
“화초에 물 좀 줄래?”

물을 주고 자리에 앉으려던 찰나,
문을 열었던 선배가 “아!” 하며 나를 불렀다.
“이거 등기 보내야 하는데, 우체국 좀 다녀올래요?”
“네. 우체국이 어디…?”

선배는 잠시 생각하더니
내 자리로 와 인터넷 창을 켜고 지도를 열었다.
“여기야. 이 골목 따라 쭉 가면 돼.”
거리로 치면 500미터쯤.
버스를 타기엔 애매하고,
걷자니 은근히 멀고 귀찮은 거리였지만,

좋았다!!!

나는 그 종이봉투를 꽉 쥐고 조용히 일어섰다.


우체국에서 돌아오자, 사무실은 그대로였다.
세무사는 여전히 닫힌 방 안에 있었고,
대체로 실장이 그 안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다.
나와는, 커피 한 잔 외엔 아무 교류도 없었다.

그때, 문을 열었던 선배가 복합기 앞에서 뭔가를 매만지더니 말했다.
“토너 다 됐나 보다. 인쇄가 너무 옅게 나와.”
그러곤 서랍에서 새 토너를 꺼내 내게 보여줬다.
“이렇게 열고, 이건 이렇게 끼우면 돼요.”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
복합기 안의 낡은 토너를 꺼내고,
선배가 알려준 대로 새 토너를 밀어 넣었다.
검은 가루가 손끝에 묻었다.
토너를 다 갈자, 선배가 한마디 덧붙였다.
“이거 비품은 다 실장님이 주문하거든요.
가서 말씀드려요. 새 걸로 갈았다고.”

나는 조심스럽게 실장 자리로 갔다.

“검은 토너 다 돼서 새 걸로 갈았고요…
하나 더 주문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실장에게서
‘알았어.’라는 대답 대신,
‘아껴 써.’라는 말이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문을 열고, 커피를 바치고, 화분에 물을 주고, 복합기에 종이를 채워 넣었다.

그리고 또, 문을 열었던 선배가 조용히 다가왔다.
“이거 영수증 좀 정리해서 붙여 줄래요?”
고무줄로 묶인 영수증 더미였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업체별로, 날짜별로 구분한 후에 갱지로 된 노트에 붙여야 한다고 설명해 줬다.

풀칠하고, 붙이고, 도장 찍고, 철하기.
그게 누가 쓴 영수증인지도 몰랐고, 왜 붙여야 하는지도 몰랐다.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월급을 받았다.
엄마는 좋아하며 절반을 달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드렸다.
그 뒤로도 수시로 돈을 요구했다. 5만 원, 10만 원… 처음엔 핑계가 있었지만, 나중엔 말도 줄었다.
그 요구는 점점 당연한 것이 되어갔고, 나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나는 성인이 되면서 모두에게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썼다. 엄마에게도, 회사에서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하지만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돈이 필요하거나,
영수증을 풀칠하거나,
우체국을 가야 하는 일 따위로,
혹은 누군가의 불안을 잠시 달래기 위해서만
사람들은 나를 찾았다.

그렇게 내가 쓰는 물풀의 개수가 늘어났고, 우체국은 하루에도 두 번씩 가는 날도 잦아졌다.
내가 한 번 다녀왔다는 걸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또 갔다 오라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한 번은 이면지를 파쇄했다가 실장한테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났다.
이면지로 인쇄해서 쓰면 되는데 그걸 왜 파쇄하냐는 이유였다.
전혀 생각도 못했다ㅡ

나는 속으로 물었다.
나는 지금, 일보다 무엇을 배우고 있는 걸까?
아마도 '참는 법'이었을 것이다.
감정을 삼키는 법.
나를 접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