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그러던 어느 날, 실장이 나를 불렀다.
뭐 실수한 게 있나 싶어 심장이 쾅쾅 뛰었다.
파일 하나를 툭 내밀었다.
머릿속엔 수많은 물음표들이 가득했다.
뭐지? 뭐지? 나 무슨 실수한 거야?
미친 듯이 머릿속을 뒤지기 시작할 때,
실장이 입을 열었다.
"작은 업첸데, 한번 맡아서 해봐."
이번엔 심장이 다르게 쾅쾅 뛰었다.
물음표들이 단번에 느낌표로 바뀌었다.
드디어, 나만의 일이 생기는 건가?
얼른 자리로 돌아가 파일을 열어봤지만,
까만 건 글씨요, 하얀 건 종이였다.
자격증 시험에서 본 것들과는 전혀 달랐다.
풀 칠이 지겨웠던 걸까.
아니면, 드디어 신입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을까.
해내고 싶은 의지가 생겼다.
수많은 커뮤니티에 가입해서 물어보고
또 물어봤다. 삼각김밥을 씹으며 혼자 앉아있었다.
밤이 깊도록, 퇴근하지 않았다.
겨우겨우 채워 놓은 빈칸들을 보고 결과치를 눌렀지만, 오류 메시지가 뜨는 실무 프로그램과 씨름을 넘어, 엎치락뒤치락 레슬링을 했다.
그렇게 레슬링 경기는 밤을 넘겼고 며칠간 계속된 끝에서야 부가세 신고라는 것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회식이 있었다.
세무사는 회식 자리에서 모두에게 칭찬을 해주었다. "이번에 ○○ 건 깔끔하게 처리했더라."
"○○팀 고객 응대 좋았어."
하지만 나에겐, 딱 한마디만 했다.
"고생했어요."
서운했지만,
나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기에 그냥, 살며시 웃었다.
그리고 웃어야 내가 뭔가 해낸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오랜만에 푹 자고 출근했던 날이었다.
실장이 또 나를 불러 파일 하나를 툭 내밀며 말했다.
“이 업체도 해봐.”
그 말엔 칭찬도, 평가도 없었다.
그냥 하나 더 준다는 말투.
이번엔 조금 더 분량이 많아 보였다.
마침 머릿속 한 구석이 맑아졌기에
아무 말 없이 살짝 웃으며 파일을 받았다.
나는 자리로 돌아가, 파일을 펼쳤고, 삼각김밥과 함께 또 밤을 버텼다.
이렇게 무심한 업체가 하나 더 붙을 때마다
무심하게 야근도 하나 더 따라붙었다.
그 업체는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서류도 엉망이고, 연락도 잘 안 됐다.
몇 번이나 서류를 확인하고, 재요청하고,
밤늦도록 삼각김밥을 씹으며
회계 프로그램과 씨름해야 했다.
며칠 후, 평소보다 늦게 도착한 서류를 확인하다
혹시 몰라 담당자에게 짧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몇 분 안에 끝났고, 나는 바로 밀린 일에 집중했다.
다음 날 아침, 실장이 말했다.
“○○ 업체에서 어제 너한테 저녁에 전화 왔다고 하더라?”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무슨 큰 실수라도 한 건가?
“업무 시간 끝나고 연락하면 좀 곤란하대.
신입이 그런 기본도 모르면 안 되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서류가 얼마나 늦게 도착했는지,
확인은 꼭 필요했는지,
말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아무도 나를 감싸주지 않았다.
나는 늘 그랬다.
알아서 한 적 없으면 혼났고,
알아서 하면, 그냥 당연한 일이 됐다.
칭찬이든, 피드백이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야근하던 내 휴대폰이 진동했다.
익숙하지 않은 번호로 기프티콘이 도착해 있었다.
[○○ 고급 초콜릿세트]
메시지는 짧았다.
“야근 많다 들었어요.
이거 몰래 드세요 :)
힘내요.”
순간,
손끝이 멈췄다.
엄마도 회사 선배나 실장도 아닌
내가 온몸으로 버텨낸 첫 번째 고객사에서 온 메시지였다.
왠지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정작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이렇게 따뜻한 메시지를 받다니.
그래서였을까.
그 초콜릿은
야근할 때마다
내가 아껴서,
내가 하나씩 꺼내 먹는,
나만의 작은 위로가 되었다.
말없이 견디는 밤들 속에서
그건,
내가 누릴 수 있었던
유일한 다정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