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
그즈음, 엄마는 전셋집으로 이사를 가자고 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넓고, 조금 더 조용한 곳으로. 보증금이 부족하다는 말에 손에 쥔 통장을, 나도 모르게 내밀었다. 내가 번 돈인데도 ‘내가 쓸 돈’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엄마는 당연하다는 듯 받았다.
이사를 하고 며칠 뒤, 내가 모은 돈을 써서 미안해지신 걸까? 엄마가 이제 돈 요구를 안 하겠다고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월세로 나가야 할 돈이 남게 됐으니 그만큼 숨통이 트였으리라.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공과금만큼은 나보고 내라고 하시길래, 자동이체만 걸어두라고 내 비상용 신용카드를 엄마에게 건넸다.
이후로 일도, 신용카드 사용 문자도 계속 나에게 왔고,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다. “너, 괜찮아?”라고.
유난히 흐리고 습했던 날,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실장이 조용히 봉투 하나를 내 책상 위에 툭 놓고 지나갔다. 노란 서류봉투. 겉에는 '빠른 등기' 네 글자만 쓰여 있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
이제 막 세무사에게 커피를 내어 드렸으니, 화장실 청소도 해야 하고, 영수증도 쌓여 있었으며, 내 업체 일들도 처리해야 할 것이 많았지만 그래도 나는 아무 말 없이 봉투를 들었다.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이미 너무 많이 배운 뒤였다.
우체국은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였고, 다녀오면 정신이 조금 맑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무실로 돌아와 다시 쌓인 일들을 보면 금세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렇게 또 일을 마무리하고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엔 세무사님이 방에서 나왔다. "이거 급한 건데, 지금 빨리 가서 빠른 등기로 보내 줄래요?"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두 번째 우체국을 다녀오고, 급한 업무 순으로 업무를 처리하려고 해도 그날따라 전화도 많이 왔고, 점심 식사 메뉴도 늦게 나왔으며, 택배도 유난히 많이 왔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 반. 퇴근을 30분 앞두고 문을 열던 선배가 다가왔다.
"이거, 지금 우체국 좀 다녀올래요?" 고개를 들자, 다른 선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거… 아까 급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 갑자기...?"
"아니, 갑자기 보내달래. 급하다고 빨리 보내달라고 하시니까. 오늘 보내야 해."
다른 선배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오늘 벌써 우체국 두 번이나 다녀왔고, 보니까 오늘 또 야근해야 할 것 같은데, 너가 퇴근하는 길에 일찍 좀 나가서 우체국을 가든가, 아니면 내일 빠른 등기로 보내도 되는 거 아냐?"
그 순간, 사무실 한편에서 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돈 아깝게 그래. 그냥 지금 다녀오면 되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봉투를 들었다. 회사 문을 나서면서 목이 잠깐 메었지만, 아무도 몰랐다.
우체국까지 매일 다니던 길이었지만, 그날따라 더 멀게 느껴졌다. 밤, 삼각김밥을 씹으며 무관심 속에 앉아 있던 그 수많은 시간들이 떠올랐다.
결국, 울컥하며 참았던 게 터졌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내가 세 번째로 우체국을 다녀온 이유는,
빠른 등기와 일반등기의 차이, 고작 천 원 때문이었고,
그 천 원이 위태위태하게 버티던 내 무언가를
댕강 잘라 버렸다는 것을.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조용하지 않았다. 퇴근 후엔 꼭 술을 마셨다.
매일 소주 한 병과 작은 컵라면 하나.
퇴근길에 꼭 사들고 집에 들어와,
내 방에 틀어박혀 마시기 시작했다.
아, 캅사이신도 사뒀다. 컵라면에 왕창 뿌려 먹었다.
“오늘은 안 마셔야지. 안 먹어야지.”
그 생각을 하면서도, 안 마시면, 안 먹으면 잠이 오질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무 일 없던 척 출근했다.
얼굴은 부었고, 속은 울렁거렸고, 입에서는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은 몰랐다. 내가 그렇게 무너지고 있다는 걸.
나는 조용히 터졌고, 조용한 사람처럼 계속 일했다.
그러다 문득, 매일 술 사 가는 게 편의점 직원 눈엔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았다.
그날부터 다른 편의점도 종종 갔다. 마치 내가 뭔가 못할 짓을 하는 사람 같았다.
그래도 소주 한 병과 매운 컵라면 하나면
그런 생각도 금세 잊혔다.
술 한 잔이면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 버렸다.
엄마가 긁은 신용카드 문자도 우스웠고,
다음 날 출근 안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주말에도 술을 마셨는데,
평일에는 엄마 아빠의 술자리가 끝난 뒤에 집에 들어와서 조용했지만,
주말은 거실이 시끌벅적해서,
내가 소리 내어 울어도 가려졌기에
처음으로 이 시끄러움이 맘에 들었다.
눈물이 안 날 때는 일부러 슬픈 영화를 골라봐서 눈물을 토해내듯 울어댔다.
왠지 평일 동안 울만큼을 미리 울어버려야 할 것 같았다.
**
그렇게 버티던 어느 날 아침,
신발을 신으려다 그대로 멈췄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는 출근을 외쳤지만, 다리는 바닥에 단단히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몇 분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결국 나는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처음으로, 무단결근이었다.
그날 하루 종일 죄책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죄책감보다 더 크게 나를 감싼 건 후련함이었다.
야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후련함.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후련함.
우체국을 가지 않아도 되는 후련함.
미지근한 물로 얼굴을 씻고,
한참을 아무것도 안 한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배는 고픈데, 뭘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출근 안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안에서 나를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이게끔 조종하던 끈들이 다 풀린 듯,
털썩 주저앉아 쉴 수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길 포기해야
비로소 나 자신을 살릴 수 있다는 걸.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건 지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