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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밤의 놀이공원은 조금씩 변해갔다.
처음엔 바닷가와 카페에서, 호텔과 펜션으로.
심야 극장 대신 모텔이 늘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은 우리의 ‘모든 데이트’를 대신하는 공간이 되었다.
공간이 바뀌면서, 그도 변해갔다.
난 그가 변한 게 아니라, 힘든 시기라 그럴 수도 있다고 애써 넘겼다.
아직도 그가 날 좋아한다고 믿고 싶었다.
처음엔 하나하나 배려해 주고 아껴주던 사람이었고, 회사가 힘들다고 투덜대도 다 들어주던 그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가 그의 입에서는 웃음기 없는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맨날 내 앞에서 힘들다, 힘들다 말은 하면서도
회사 다닌다고 은근히 우쭐대는 거, 좀 웃겨.
그 학력에, 그 연봉에— 그게 무슨 회사라고…”
“그래서 내가 늘 말하잖아.
넌 아직 어려.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나니까 네 옆에 있어주는 거야.
다른 사람이었으면, 벌써 떠났어.”
...찝찝함.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은 죄책감.
다음엔 조심해야지 하는 긴장감.
회사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들을 그에게도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운동을 시작했다.
“나 요즘 몸 키우는 중이야.”
헬스장에서 거울 셀카를 찍어 보내던 그의 표정은 어딘가 들떠 있었고,
아직도 말라 있는 팔뚝에는 핏줄이 희미하게 떠 있었지만
그는 그걸 보며 한참이나 이야기했다.
“운동하면 좀 나아지겠지? 자신감도 생기고.”
처음엔 잘됐다 싶었다.
뭔가에 몰입하는 그의 모습이 반가웠고,
자존감을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을 시작한 그는
몸이 바뀌어갈수록
말투도 조금씩 달라졌다.
예전엔 아무렇지 않게 넘기던 말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작은 일에도 불쑥 짜증을 냈다.
그의 ‘불안’은
하루하루 훈련처럼 더 단단해졌고,
그 불안은
늘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나에게
가장 먼저 쏟아졌다.
그의 눈치를 보게 되면서
내가 말할 수 있는 범위는 점점 좁아졌다.
그러다 보니
나는 말수가 줄었고,
점점 움츠러들었다.
무슨 말을 하면 안 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머릿속에 시뮬레이션을 돌리느라
항상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회사에서도, 그 앞에서도 눈치만 보느라
움츠려있던 나를 그가 위아래로 훑더니 말했다.
“너 요즘 좀… 너무 꾸미질 않아.”
“여자는 자기 관리를 해야지.”
“맨날 무채색에 헐렁한 티만 입고 다니면, 누가 봐도 성의 없어 보여.”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에서 무언가 뜨겁게 치밀었다.
하지만 바로 말하지 못했다.
익숙했다.
말하면 또 예민하다는 소리를 들을 테니까.
나는 원래부터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화려한 옷, 진한 화장, 반짝이는 액세서리.
그런 건 내 성격과 맞지 않았다.
조용하고 담백하게,
깔끔하고 편안하게—
그게 내 방식이었다.
그런 나를
처음엔 좋아했다고 했다.
“꾸미지 않아도 예쁜 사람, 멋있다.”
그랬던 그가,
이젠 말한다.
“여자는 그래도 좀 꾸며야지. 성의 없어 보여.”
나는 변하지 않았다.
그가 변한 것이다.
아니,
그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매번 어떤 나를 덜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조금씩 덜 어내며 살고 있을 무렵,
회사에서 중요한 업무를 맡게 됐다.
정신없이 일에 매달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와의 거리도 멀어졌다.
시간이 지나고 얼마 후, 회사 회식에서 섭섭했던 일이 생겼다.
내 말을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해서
오랜만에 그를 만났다.
나를 한동안 못 봐서일까..
아니면 그동안 야근을 한다고 말해서일까..
따뜻한 말보다 먼저 돌아온 건,
내가 왜 여기에 나왔냐는 듯한 차가운 말투였다.
입고 온 옷은 왜 그러냐는 말,
화장도 안 하니 회사에서 예쁘게 봐주겠냐는 말,
너같이 어리고 잘 모르는 애를 여태
데리고 있는 너희 회사도 참 대단하다는 말.
그러고는 늘 그렇듯
나니까 네 옆에 있어주는 거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주저앉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길에서, 그냥 소리 내 울고 싶었지만, 그의 눈치를 보느라 그러지도 못했다.
그게 더 비참했다.
차라리 헤어지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 말조차 제대로 안 나와서, 애꿎은 보도블록 무늬만 보며 눈물을 참았다.
참는 게 사랑인 줄 알았다.
내 탓이라 여겼다.
겨우 정신을 붙잡고 집에 도착해
불이 꺼진 거실을 무심코 지나가다
널브러진 술병을 밟고 뒤로 넘어졌다.
순간 울컥, 뭔가 북받치는 서러움과 울분이 튀어나왔다.
너무 참아서일까..
미친 듯이 소리 내며 울었다.
늦은 시간이라는 것도, 엄마 아빠가 자고 계신다는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나도 진짜 힘들다.
네가 이렇게까지 예민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어.”
또 울음이 터지려던 나는, 참으며 그 문자를 몇 번이고 읽었다.
그러다 문득... 그 문자가, 그 문장이,
회사에서 처리하는 영수증 금액처럼 느껴졌다.
뭔가 흐리고 복잡하던 머릿속이, 점점 깨끗이 비워지는 듯했고, 눈가에 고였던 눈물도 말라갔다.
마치 내가 제삼자가 되어 내 상황을 바라보는 관객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냥, 차단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 오랜만에 깊이 잠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