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는 자와 찍는 자

by 주엉쓰
어느 순간부터 전시회 정보를 검색하는 일이 꺼려진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겐 그렇다.


대중의 이목을 끌기 위한 마케팅이 중요하다는 건 안다.
작품성뿐 아니라 대중성도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내가 예술에서 느끼고 싶은 건

그런 종류의 자극이 아니다.
포스터에 단 하나의 점만 찍혀 있어도,
그 점 하나가 궁금해져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힘.
그 미묘한 ‘끌림’이 예술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작품을 보기 전부터

이미 ‘본 적이 있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전시장에 가기도 전에 SNS에서

수십 장의 사진이 먼저 올라오고,
유명 인플루언서의 피드에서

작품의 전경이, 조명 각도가,
심지어 관람 동선까지 미리 노출된다.
전시장은 더 이상 ‘발견의 장소’가 아니라,
‘복제된 이미지의 재확인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문득 생각했다.
우리는 전시회를 ‘작품을 느끼러 가는 걸까’,
아니면 ‘작품 앞에서 찍힌
내 사진을 남기러 가는 걸까’.


스마트폰을 들고 작품 앞에 선 사람들의 얼굴엔
경외심보다 ‘구도’를 찾는 눈빛이 먼저다.
한때 예술이 인간의 감각을 깨우는 행위였다면,
이제 예술은 인간의 표정을 꾸미는 배경이 되었다.
그 순간, 예술의 주어는 ‘작품’에서 ‘나’로 바뀐다.


진짜 전시의 작품은

그 공간 속 캔버스가 아니라,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라온 셀카일지도 모른다.

예술은 더 이상 감상되지 않고, 소비된다.

우리는 ‘작품을 보았다’는 경험보다

‘작품을 보았다는 증거’를 더 소중히 여긴다.


예술의 본질이 변한 것일까?
아니면 감각의 방식이 달라진 걸까.


과거 예술이란 ‘감정의 교류’였다.
화가의 붓 끝에 담긴 고독,

조각가의 망치질에 담긴 기도,
관객은 그것을 느끼며 자신 안의 무언가를 깨닫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예술은 ‘기록의 경쟁’이 되었다.
같은 작품을 앞에 두고도
사람들은 ‘좋아요’를 받을 만한 각도와 구도를 찾는다.


예술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존재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우리는 작품을 ‘보는’ 대신 ‘찍는다’.
그 사진은 필터를 거치고, 문구를 덧입히며,
다시 또 하나의 콘텐츠가 된다.
이 과정에서 예술은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재가공된 데이터’로 변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 변화가 모두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술은 시대의 언어를 따라 변해왔고,
대중이 머무는 곳에서 새로운 형태로 살아남았다.
중세에는 교회 벽화가,
근대에는 인쇄물이,
오늘날에는 SNS가 그 무대가 된 것뿐이다.


다만, 한 가지가 달라졌다.
과거의 예술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완성되었지만,
지금의 예술은 ‘시선의 유통’을 전제로 만들어진다.
작품은 처음부터 ‘촬영’을 위해 조명과 각도를 갖추고,
전시 기획은 관람객의 동선보다
‘사진이 잘 나오는 스팟’을 우선한다.
관람객은 예술을 느끼기보다
‘나의 감각을 증명하는 공간’으로 전시를 소비한다.


예술은 이제 감정이 아닌, 태그로 기록된다.

#감성전시 #오늘의나 #힐링 #분위기좋은곳

감상문 대신 해시태그가, 감정 대신 알고리즘이

예술의 가치를 결정한다.
‘좋아요’가 많은 작품이 ‘좋은 작품’이 된다.
감상은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숫자의 함수로 환산된다.


물론 나는 이를 ‘예술의 죽음’이라 말하고 싶진 않다.
오히려 예술은 생존 방식을 바꿨을 뿐이다.
전시장의 벽과 조명 속을 떠나,
이제 사람들의 손바닥 안에서 살아남는다.
좋아요와 댓글 사이에서,
사람들의 욕망과 피로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진화한다.


다만, 그것이 여전히 ‘예술’인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예술이란 원래, 느끼는 자와 찍는 자 사이의
보이지 않는 긴장 속에 존재했던 것이다.
감정의 떨림을 느끼는 자,
그 떨림을 기록하려는 자.
우리는 언제부터 그 균형을 잃어버렸을까.


예술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감동의 자리는
언제부턴가 ‘화면 속 나의 표정’이 대신하고 있다.
감동이 사라진 자리를,
‘좋아요’가 채우고 있다.


예술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소비된다.
그것이 전율이든, 기념품이든,
혹은 피드 속 한 장의 셀카이든.


나는 누군가를 탓하지 않는다.
대중도, 예술가도, 시대도 아니다.
다만, 느끼는 대신 찍는 이 시대의 속도를 탓할 뿐이다.
그 속도 속에서 예술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건 아직, 모르겠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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