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릭쇼(Freak Show)'는 한때 사람들의 오락거리였다.
특이한 신체를 가진 사람, 선천적 장애를 가진 사람,
혹은 사회적으로 ‘비정상’으로 분류된 이들을 무대 위로 올려놓고,
대중은 돈을 내고 그들을 구경했다.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렸고,
누군가는 웃으며 돈을 냈고,
누군가는 무관심했다.
지금의 우리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야만적이다”, “비인간적이다.”
그러나 그 혐오 속에는
우리가 부정하고 싶은 감정이 숨어 있다.
다수의 인간은 과거의 프릭쇼를 손가락질하면서도,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구경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재미’로, 누군가는 ‘호기심’으로,
또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며
자신이 ‘정상’임을 확인하고 안도했을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수요가 있기에 공급이 생기고,
그 수요는 언제나 ‘보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21세기에도 프릭쇼는 사라지지 않았다.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TV 예능의 자극적인 소재,
SNS에서 소비되는 타인의 실패와 불행,
댓글창에서 벌어지는 집단 조롱과 비난.
우리는 이제 서커스 천막 대신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누군가의 삶을 구경한다.
‘선천적 장애인’이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사람’이든,
혹은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누군가’이든,
그들을 향한 클릭 수는 여전히 많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결함을 통해
자신의 안정을 확인하는 존재다.
그것이 인간의 이면에 숨겨진
부끄럽고도 진실한 욕망이다.
차별은 인간이 만든 또 다른 프릭쇼다.
무대 위에는 ‘다른 사람’이 오르고,
관객석에는 ‘우리’가 앉는다.
극단적인 인종차별만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구분 짓는다.
말투, 옷차림, 학력, 직업, 외모, 나이.
작은 차이를 빌미로 선을 긋고,
그 선 안에서 ‘나’를 안전하게 보호한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오래된 본능이다.
‘다름’은 때로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감정을 가진 존재인 한,
차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을 자각하고,
끊임없이 부끄러워하며 맞서는 태도.
그것만이 우리가 이 어두운 본성에
조금이라도 빛을 비추는 방법일 것이다.
세상은 여전히 무대를 만들고,
그 위엔 언제나 누군가가 서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쪽에 서 있는가.
손가락질하는 쪽인가,
부끄러워하며 눈을 돌리는 쪽인가,
아니면 그 부끄러움을 인정하고
조용히 무대의 불을 끄는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