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너무도 흔히 쓰이지만, 정작 ‘정의’를 ‘정의’하기는
가장 어려운 말이다.
우리는 정의를 흔히 “악은 벌 받고 선이 이기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은 어디서 오는가.
사전적 의미는 이렇게 적는다.
“바른 것에 의의를 둔다.”
하지만 이 정의조차 모호함을 지우지 못한다.
‘바른 것’이란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판별하는가.
바름이란 고정된 진리가 아니다.
시대와 권력이 바뀌면, ‘바른 것’의 얼굴도 달라진다.
법이 그것을 규정하기도 하고, 사회가 합의하기도 하지만,
결국 정의는 권력의 손에 의해 쓰이기도, 왜곡되기도 한다.
정의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에겐 선이 곧 악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악이 곧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그래서 정의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정의란, 부당함과 악행에 맞서는 힘이다.”
그러나 부당함을 규정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면,
정의 역시 서로 다르다.
정의의 이름으로 맞서는 두 진영이 있다면,
각자에겐 상대가 곧 ‘악’이다.
정의는 칼이기도 하고, 방패이기도 하다.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은 이 질문을 드러낸다.
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학도병들이 포로로 잡혀 자신들이
묻었던 지뢰를 맨손으로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있었다.
그 순간,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무너진다.
“정의”라는 이름은 누구의 손에 들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피해자에게는 복수의 정의, 가해자에게는 잔혹한 부당함.
그 어느 쪽도 쉽게 선악으로 재단할 수 없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전쟁의 불길에 빠뜨린 장본인이지만,
프랑스인들에게는 영웅이었다.
칭기즈칸은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지만,
몽골에게는 민족의 시조였다.
히틀러는 전 세계에 전쟁과 비극을 안겼지만,
당시 독일 일부 국민에게는 절망 속에서
사기를 북돋운 지도자처럼 비쳤다.
정의는 언제나 상대적이며,
특정한 시대와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언제나 ‘정의’의 이름으로 잔혹해질 수 있다.
그들은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지만,
명령이 정의의 이름을 가졌을 때,
잔혹함은 정당화된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정치적 진영이 서로를 향해 정의를 외치고,
사회적 갈등 속에서도 각자 자기 편의 정의를 주장한다.
한쪽에선 ‘인권’을 말하고, 다른 쪽에선 ‘질서’를 말한다.
누군가에겐 옳은 목소리가,
또 다른 누군가에겐 혼란의 불씨가 된다.
SNS 시대는 이 경향을 더욱 극단적으로 만든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서로 다른 정의가 난무한다.
각자의 타임라인은 자신만의
정의를 강화하는 울타리가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서로 다른 이념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는 언제나 서로의 정의가 존재한다.
정의라는 이름은 악에 맞서는 무기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의 목을 겨누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기도 한다.
정의는 하나의 보편적 진리가 아니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할, 다층적 관점이다.
어쩌면 우리는 ‘정의’보다는
‘정당화’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옳음을 주장하기보다,
내가 옳다고 믿게 만드는 기술이 더 중요해진 세상.
그런 시대일수록, 정의는 외침이 아니라 ‘태도’여야 한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시선,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으려는 용기,
그것이 오늘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정의다.
그렇다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정의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