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자주 들려오던 소리였다.
맞벌이로 밤에 출근하느라 보기 어려웠던 부모님의 얼굴을
이제 학원을 다녀오면 저녁에 볼 수 있었다.
서로를 향해 날이 서 있는 얼굴,
다시는 보지 않을 것 같은 얼굴,
주변은 전혀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집을 살 때 함께 사 두었던 화분들은
꽃이 피기도 전에 모두 깨져 버렸다.
엄마가 집을 나가면서
그렇게 바라던 ‘화목한 집안의 행복’도 함께 깨졌다.
굳게 닫힌 안방에서 아버지가 울고 계셨다.
열 살이었던 나보다 어린 아이처럼.
그치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연민이 들지 않았다.
“우는구나.”
그날, 나는 울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감정을 잃었다.
사촌 형제들은 모두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실했다.
비교가 일상이었다.
그 비교 속에서 ‘돈’이라는 것의 무게를 배웠다.
물론, 그걸 핑계로 삼을 생각은 없다.
가정이 불우하다는 이유로
사춘기를 격정적으로 보냈다.
그래서 할머니께 늘 죄송한 마음뿐이다.
그 시절 내 옆에는 늘 할머니가 계셨다.
‘비교’를 당할수록, 나는 더 반대로 살고 싶었다.
친척들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그때는 그게 유일한 반항이었다.
그래서 나는 돌연변이었다.
그 시절 서울이 어땠는지 묻는다면,
까루프를 기억하는가.
그곳이 막 문을 닫고, 그 자리에 홈플러스가 들어서던 때였다.
갈매기살 3인분 9,900원,
우리 동네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게였다.
친구 생일파티는 늘 롯데리아 2층에서 했다.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그게 내가 서울에서의 마지막 기억이기 때문이다.
한 살부터 열여덟까지 서울에서 살았지만,
돌이켜보면 특별한 게 없다.
그 흔한 롯데월드는 초등학교 때 단 한 번,
한강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가족 나들이란 것도 없었다.
서울에서 살고, 내 집을 마련하고,
무언가를 얻으면 뭐 하는가.
가슴에 남는 게 없더라.
그래서 문득 생각한다.
지금 아버지는, 행복할까.
행복이란 건
눈앞에 있으면서도, 눈앞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말썽만 부리던 나는
열여덟, 아버지에게서 버려졌다.
어쩌면 내가 먼저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8년 만에 엄마를 처음 만났다.
경상북도로 향하는 버스 안,
아버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본 ‘소년의 울음’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에도
나는 감정을 되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