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기억이 난다면,

by 주엉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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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도착한 곳은 구미 버스터미널이었다.
서울 촌사람들은 어릴 적엔 ‘서울’을 벗어나면

모두 시골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터미널은 낯설었다.
눈앞엔 허허벌판이 펼쳐져 있고,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같은 방향으로 줄지어 걷고 있었다.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지만,

나는 그저 그들의 뒷발을 따라 걸었다.


조금 가니 택시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고,

마중 나온 가족들이 보였다.
그 너머로 보이는 건물은 높아야 4층, 5층 남짓이었다.


“됐어여.”
“차 막혀여.”
“밥뭇나.”
“저기로 돌아가여.”


처음 듣는 억양이었다.
신기하게도 저 말들은 존댓말이 아닌데,
어미에 ‘여’를 붙이니 마치 존댓말처럼 들렸다.
처음엔 다들 싸우는 줄 알았다.
구미 사람들의 사투리였다.
거칠지만 어딘가 따뜻했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꼬깃하게 접어 둔 종이를 꺼냈다.
어머니가 일하고 계신 가게 이름이 적혀 있었다.


줄지어 선 사람들 뒤에 서 있다가 내 차례가 오자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고 택시에 올랐다.


“서울에서 왔나 보네.”
“네.”


그땐 지역 간 이동이 흔하지 않았으니,
어린 나이에 짐을 싸서

서울에서 내려온 내가 신기했을 것이다.


택시 기사는 이런저런 말을 걸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말을 걸어줬다’는 사실만 남아 있다.


어머니가 일하고 계신 곳은

동네 상권의 작은 호프집이었다.
그곳에서 ‘진영이 형’을 처음 만났다.
형은 어머니와 함께 일하는 직원이었다.


왜 그를 내게 소개해줬는지 그땐 몰랐다.
진영이 형은 착하게 생겼다.
그래, 어쩌면 조금은 바보같이.


누가 봐도 무시당할 것 같은 얼굴,
하지만 그 안에는 이상하리만큼 따뜻한 웃음이 있었다.
‘착하다’는 말이 얼굴에 새겨진 사람.


형은 내게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 주영아.”


나는 속으로 답했다.
‘네, 형. 반가워요.’


진영이 형은 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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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나는 진영이 형의 집에서 지냈다.
어머니는 아직 집이 없었기에,
나를 형에게 맡긴 것이다.


형은 내게 정말 잘해줬다.
내 집처럼 편히 지내게 해 줬고,
구미에 처음 와 낯설었던 내게 따뜻하게 대해줬다.


하지만 형은 외로워 보였다.
항상 웃고 다정했지만, 그 뒤에는 깊은 그늘이 있었다.


퇴근 후엔 매일 술을 마셨다. 하루도 빠짐없이.
안주는 김치, 어떤 날은 멸치.
그렇게 마시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들었다.


진영이 형이 술을 마실 때, 나는 말동무가 되어드렸다.
그게 고마웠는지 형은 자주 인생 이야기를 꺼냈다.


“잘 살아라.”
“사고 치지 마라.”
“후회할 일 만들지 마라.”


걱정이 묻은 말투였지만,
그 말들은 때때로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다.
형의 눈에는 살기가 스쳤고, 주먹은 꼭 쥐어 있었다.


세상이 형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형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저 ‘바보인 척’하고 있었다.
웃으며, 친절하게, 철저히 자신의 분노를 외면했다.
밤마다 술을 마시며

조금씩 새어 나오는 그 분노를 눌러 담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 형에게 나는 늘 궁금증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 집을 떠나기 전날 밤,
어김없이 둘이 마주 앉은자리에서 결국 물었다.


“형, 저는 형이랑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이인데,

왜 이렇게 잘해주셨어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날의 공기는 고요했고,

좁은 원룸의 온기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그리고 형이 조용히 말했다.


“어느 날,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어딘가에서,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아도,

아… 그때 그런 형이 있었는데…

그렇게만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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