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꿈 밖에서

by 주엉쓰

아버지는 늘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꿈보다 생존을 먼저 말했고,
감정보다 책임을 앞세우던 분이었다.


“남자는 약하면 안 된다.”
“세상은 네게 자비롭지 않다.”
그 말속엔 늘 냉정함이 묻어 있었다.
어린 나는 그게 무섭기도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믿음이 갔다.
아버지는 늘 옳았으니까.


아주 어릴 적,
나에게도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그건 ‘연기자’였다.


텔레비전 속 사람들은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존재 같았다.
그들은 울고 웃으며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갔다.
나는 그게 신기했다.
그렇게 다른 얼굴로 살아볼 수 있다는 게,
한 사람의 인생을 잠시 빌려 살아볼 수 있다는 게.


하지만 그때 나는 그저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건 말로 꺼내면 부서질 것 같은,
나만의 비밀이었다.


아버지는 늘 말하셨다.
“형사가 되어라. 세상에 필요한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형사.
정의롭고, 강하고, 냉철한 사람.
그건 아버지가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인간상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그 사람이 되길 바랐다.
나는 그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그분의 인생은 언제나 나의 기준이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씩 자기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음악 학원을 다니고,
누군가는 모델 학원에 등록했다.
그때 나는 용기를 냈다.
한 번쯤 말해보고 싶었다.


“아버지, 나…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순간 아버지는 술잔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셨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분의 시선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런 건 될 놈만 된다.”
“꿈 깨라.”


짧은 두 문장이었다.
그 말이 내 안의 무언가를 부러뜨렸다.


그날 밤,
나는 한참을 뒤척였다.
‘될 놈만 된다’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말은 단순한 충고가 아니라
‘너는 안 된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친구들은 모두 자기 꿈을 향해 달려갔다.
무대에서, 연습실에서, 카메라 앞에서.
나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마음 한켠이 시들어갔다.


아버지는 그래도 내게 늘 말씀하셨다.
“지금 친구들 좋을 거 하나 없다.
성공하면 다 너한테 붙는다.
지금은 공부나 해라.”


그 말은 일종의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언제나 걱정이 많았고,
내가 세상에 상처받지 않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내게는 늘 벽처럼 느껴졌다.
마치 세상을 살아가는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고,
내가 그 길에서 벗어나는 건
실패로 향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그 시절을 ‘멈춤의 시간’이라 부른다.
모든 친구들이 자기 색을 찾아가는 동안,
나는 한 곳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그건 단순히 용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기대와 나의 욕망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 시간이었다.


한편으론 아버지의 말이 맞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은 정말 냉혹했다.
누군가는 꿈을 말하는 동안,
누군가는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아버지는 그 세상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나에게 “현실을 보라”라고 말한 것이겠지.


하지만 그 현실은 너무 차가웠다.
꿈은 어린 날의 사치처럼 느껴졌고,
도전은 무모한 짓처럼 여겨졌다.
나는 그렇게 ‘안전한 삶’이라는 이름의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 틀은 아버지가 만든 게 아니라,
내가 아버지를 닮아 만든 거였다.


나는 종종 상상했다.
아버지에게 내 꿈을 처음 꺼냈던 그날 밤,
만약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그래, 해봐라.
세상은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해보는 건 나쁘지 않지.”


그 한마디가 있었다면
나는 조금 더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아니면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


그건 이제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그 말들 속엔 분명 사랑이 있었다.
“될 놈만 된다.”는 냉정한 한마디도,
사실은 “상처받지 말라”는 또 다른 표현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실패하는 걸 견딜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세상에 부서지는 걸
보지 않으려 했던 사람.


그래서 미리 단단해지라 말했고,
미리 포기하라 가르쳤던 것이다.
그분의 방식은 언제나 사랑의 방어였다.


아버지, 저는 이제 그 마음을 압니다.
당신이 왜 그렇게 냉정했는지,
왜 그렇게 꿈을 현실로 덮어버렸는지.


당신은 아마 나보다 더 큰 꿈을 꾸셨던 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이 그 꿈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래서 아들에게는

“현실을 보라”는 말을 남겼던 거겠죠.


그때는 몰랐습니다.
당신의 말이 나를 꺾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말이었다는 걸.


이제는 다 압니다.
그 모든 말이 결국 “사랑한다”는 뜻이었다는 걸.


지금의 저는
아버지가 그토록 염려했던 그 길 위에 서 있습니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하고, 때로는 외롭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단단함으로 버티고,
제가 선택한 따뜻함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아버지에 대한 가장 솔직한 존경의 방식입니다.


“아버지, 당신은 제게 세상을 버티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그 세상 속에서 저를 지키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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