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아 있는 사람

by 주엉쓰

성인이 되었을 때,
나는 또래들보다 조금 더 성숙하다고 느꼈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생각이 깊다”,

“나이에 비해 차분하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처음엔 좋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그 말이
나를 조금 외롭게 만들었다.


왜냐면 나는 그저,
조금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먼저 일을 시작했다.
친구들이 여전히 교실에 앉아 웃고 떠들던 시절,
나는 이미 사무실에서

사람들의 표정과 눈치를 읽고 있었다.
처음엔 그게 어른이 된다는 뜻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았다.
그건 ‘어른스러움’이 아니라
‘조심스러움’이 몸에 밴 사람이 된다는 뜻이었다는 걸.


나는 사회의 냉정함을 일찍 배웠다.
누군가는 웃으며 뒤돌아섰고,
누군가는 이유 없이 화를 냈다.
말의 진심과 거짓을 구분하는 법,
눈빛 속에서 피로를 읽는 법,
그 모든 걸 너무 일찍 배웠다.


그때부터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상대의 표정과 목소리를 먼저 살폈다.
그건 아버지에게서 배운 습관이었다.
아버지는 늘 사람을 단박에 꿰뚫어 봤다.
표정 하나, 말끝 하나로 상대의 속을 읽어냈다.
그걸 나는 “멋있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건 멋이 아니라,
세상에 오래 다친 사람의 생존 기술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닮았는지,
나도 어느새 그렇게 변해 있었다.
무심코 입 밖으로
아버지의 말투가 흘러나올 때가 많았다.


“어차피 걸릴 거짓말 하지 마.”
“빨리 대답해.”
“일 키우고 나서 그때 가서 말하지 말고.”
“무슨 생각해.”


그 말들이 내 입에서 나올 때마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그건 분명 내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낮고 단호한 음색이 섞여 있었다.
그건 바로, 아버지의 음색이었다.


어릴 때 그 목소리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하고, 안심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게 이상했다.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다.


어느 날 퇴근길,
차를 몰고 가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힐끗 바라봤다.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밖만 보고 있었다.
나는 괜히 말을 걸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짧게, 툭 던졌다.


“뭐 해.”


그 한마디를 내뱉고,
순간 나는 핸들을 잡은 손끝이 굳어버렸다.
그 말투,
그 어색한 타이밍,
그 억눌린 듯한 부드러움.


그건 정확히 아버지였다.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운전하던 차 안.
나는 옆자리에서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분은 조용히 창밖을 보다가
갑자기 나를 향해 말했다.


“뭐 해.”


그때의 나는 귀찮다는 듯
“그냥.” 하고 대답했던 것 같다.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아버지는 다시 운전대에 시선을 고정했고,
차 안에는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이 단순한 잔소리나 습관이 아니었다는 걸.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아버지가 나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조심스러운 ‘사랑의 형태’였다.
어색함을 감수하면서라도
대화를 시도하려는 작은 몸짓이었다.


나는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한참을 생각했다.
왜 나는 그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왜 그 한마디에 담긴
외로움을 보지 못했을까.


이제는 알겠다.
그분은 정말로 말을 걸고 싶었던 것뿐이었다는 걸.
그저 나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세대였으니까.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해도,
그분은 늘 곁에 있으려 했다.


생각해 보면 나도 그랬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대화의 타이밍을 놓쳐버리면
괜히 “뭐 해” 하고 말을 꺼낸다.
그건 진짜 대화가 아니라,
침묵이 무서울 때 꺼내는 다리 같은 말이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도 같은 마음이었을 거라는 걸.
나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말로 다가가는 법을 몰랐던 사람.


그분은 늘 강해 보였지만,
그 강함은 외로움을 덮는 갑옷이었을 뿐이다.


나는 어느새 그분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했던 말,
그분이 살던 방식,
그분이 사람을 대하던 거리감까지.
이제는 그것들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나를 보호해 온 무언가를 느낀다.


나는 아버지의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고,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품는다.
그게 내 세대의 사랑이자
그분으로부터 이어받은 유산이다.


가끔은 전화를 드린다.
그분은 여전히 짧게 대답하신다.
“밥은 먹었냐.”
“응, 먹었어.”
“그래.”
그리고는 또 조용해진다.


예전엔 그 침묵이 어색했다.
이제는 익숙하다.
그건 그분이 편한 방식의 대화다.
그분은 여전히 말을 많이 하진 않지만,
나는 그 짧은 대화 속에서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마음을 읽는다.


그분은 여전히 세상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단단함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제 그 단단함을 이해하며 산다.


“아버지, 당신은 여전히 제 안에서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전히 당신을 닮아갑니다.
다만, 이제는 그 닮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것이 당신이 내게 남긴
가장 조용한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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