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그저 숫자다.
누가 몇 살인지, 몇 년을 살아왔는지는
그 사람을 설명하는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사회가 평가하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책임감을 지니고 난제를 헤쳐나가는 능력이다.
문제를 회피하고, 결정해야 할 순간에 미루고,
불편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방어하기만 한다면
그는 여전히 사춘기 어딘가에 멈춰 있다.
인간은 결국 홀로서기를 통해 성장한다.
누구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길을
자기 발로 서서 걸을 때
비로소 어른이라는 이름이 따라온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세상에는 나이를 먹었지만
여전히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겉으로는 “이해한다”라고 말하지만,
대화의 끝은 항상 같다.
“봐, 내가 맞았잖아.”
그 속엔 존중도 배려도 없다.
이타적인 척하지만, 그건 ‘이해’의 얼굴을 한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확신일 뿐이다.
“난 너를 이해했는데,
넌 왜 나를 이해하지 못하니?”
이 말이야말로 어른의 언어가 아니다.
이 말의 구조 자체가 이미
관계의 위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대놓고 이기적인 사람이 더 낫다.
적어도 그들은 솔직하니까.
나이를 먹었는데도 성장하지 못한 사람은
유독 하나의 특징을 보인다.
세상을 자기중심으로만 본다.
타인의 말은 곧장 자기 해석으로 바뀌고,
상대의 감정보다 자신의 판단이 먼저다.
겉으로는 부드러운 척 하지만,
조금만 건드려도 결국 이렇게 말한다.
“내 말이 맞다니까.”
그들의 시간은 흐르지만,
내면의 성장은 멈춰 있다.
어느 날 농담을 하나 적었다.
그저 가벼운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 오해를 낳았고,
돌아온 건 더 큰 무례함이었다.
무례함에는 무례함으로,
조롱에는 조롱으로 맞서는 시대.
타협의 지점은 사라졌고,
오해를 이해로 바꾸려는 시도조차 없다.
관계에는 중간 지점이 없다.
무게 추는 한쪽만 움직여서는
결코 균형을 찾을 수 없는데도.
SNS는 특히 더 그렇다.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라기보다는
판단과 단정이
먼저 튀어나오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이 글을,
눈앞에 앉은 실제 인물을 향해
그대로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못한다.
감히 그럴 수 없다.
철천지 원수에게도 조심스러울 말들을
여기서는 아무렇지 않게 던질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여전히 낯설고 두렵다.
아니면,
원래 이곳이 그런 곳이고
끝까지 저항하는 건
나뿐일지도 모른다.
요즘 사람들은
“개인 사회” 속에서 산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개인화가 심해졌고,
혼자 살아가는 기술이 필수가 되었다.
하지만 개인사회가 심해졌다는 것과
사회적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건 다르다.
성장은 혼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혼자 설 줄 아는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언어를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상은 점점 빠르게 변하지만
성장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 타인을 존중하는 능력
•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는 용기
• 오해를 이해로 바꾸려는 태도
• 문제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책임감
이 네 가지가 자리 잡지 않는 한,
나이는 아무 의미 없다.
서른이어도 열다섯 일 수 있고,
쉰이어도 스무 살일 수 있다.
나이는 키가 크는 것처럼
저절로 늘어나지만,
성장은 스스로 선택해야만 따라온다.
무례함은 나이와 관련 없다.
성장은 나이와 무관하다.
성숙은 결국 태도에서 온다.
어른이란,
나이를 먹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나이에 속지 않고,
성장의 본질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