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에 작은 상자가 도착했다.
예전 같으면
이 정도로 설레지는 않았을 텐데,
오늘은 그랬다.
조심스럽게 박스를 열었다.
정수기 필터 하나.
설명서 한 장.
그리고, 이상하게도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것 같은 감정 하나.
나는 설명서를 펼쳤다.
한 줄 한 줄,
차근차근 따라 읽으며
나사를 풀고,
부품을 분리했다.
이 과정이 이렇게 복잡했었나 싶었다.
하지만 내 손은
놀랍도록 침착했다.
새 필터를 장착하고
덮개를 닫았다.
딸각.
작은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도
딸각— 하고
제자리를 찾아간 것 같았다.
물을 받았다.
쪼르르…
쪼르르…
그 익숙한 소리조차
오늘은 조금 다르게 들렸다.
“필터 교체가 완료되었습니다.”
드디어 그 말을 들었다.
그토록 반복되던 재촉도,
차가운 무심함도,
오늘은
축하처럼 들렸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맑고 따뜻한 느낌이
천천히,
내 안을 채워갔다.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는 여전히
실패했던 밧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흔적조차,
그저 ‘지나간 일’처럼 느껴졌다.
필터를 교체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몇 분이었지만,
내 마음의 필터가 바뀌는 데는
열두 화가 필요했다.
창밖에는
햇살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