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는 내 방 안에 다시 스며들고 있었다.
정수기 옆에 놓인 컵을 닦았다.
며칠 전까지는
텅 비어 있었던 식탁 위에
작은 과일 한 조각을 올려놓았다.
창문을 살짝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먼지가 같이 들어왔지만
그조차 반가웠다.
라디오를 틀었다.
뉴스는 여전히 팍팍했지만
어디선가 흘러나온 음악 한 곡이
문득 눈시울을 건드렸다.
가사도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노래가 나를 위로했다는 건 분명했다.
“필터 교체가 필요합니다.”
정수기의 그 목소리는
여전히 똑같았지만
이상하게 오늘은
그게 나를 재촉하는 게 아니라
기다려주는 것 같았다.
나는 필터를 주문했다.
내일쯤 도착할 거라고 했다.
거실 소파에 앉아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셨다.
그건 여전히 필터를 거치지 않은 물이었지만
내겐 처음으로
맑은 무언가가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다시 한 발자국쯤
나아가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씩,
조금씩…
조금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