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딸과 동행한 영국 항의방문 투쟁
2016년 검찰수사로 가해기업의 실체가 드러나기 전까지 가습기살균제참사의 피해문제 해결은 더디고 더뎠다. ‘끝이 있는 것일까,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종종 찾아왔다.
그동안 피해자모임과 환경보건시민센터는 기자회견과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여론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활동을 해왔다. 국회를 찾아다니며 문제해결의 계기를 찾고자 했다. 정부는 뒤늦게 폐 손상을 중심으로 부분적인 피해구제 절차를 진행했다. 가해기업들은 사실상 뒷짐을 지고 있었다. 정부의 소극적 대처와 여대야소 국회 상황에서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2015년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영국에 있는 옥시레킷벤키저(이하 옥시) 본사를 압박하는 방안을 고민했다. 영국 옥시 본사 항의방문을 통해 주주들에게 가습기살균제참사를 알림으로써 문제해결의 계기를 마련하기로 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주주총회 일정에 맞춰 항의방문 일정을 잡고 항의방문단을 조직했다. 항의방문단은 환경보건센터 관계자들과 피해자 가족 대표단으로 구성했다. 중요한 일정이었으므로 국내 참사의 실상을 임팩트 있게 전달할 수 있는 피해 증언자를 참여시키는 방안을 고민했다.
가능하면 중증 피해자가 동행하는 것이 필요했지만, 현실적으로 휠체어와 산소 호흡기를 달고서 갈 수 있는 여정이 아니었다. 차선책으로 고심해서 결정한 것이 어린이 피해자가 동행하는 것을 선택했다. 어린이 피해자의 경우 보호자 동행이 필요했다. 어차피 피해자 대표로 가야 하는 상황에서 딸과 동행하는 것을 선택했다.
피해자 가족모임에서는 나와 딸, 운영진에서 두 명의 피해가족이 동행해서 총 4명이 함께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는 최예용 소장이 함께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공동대표를 맡고 있었던 백도명 교수(서울대 보건대학원)는 당시 외국에서 가족과 함께 안식년 휴가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합류했다. 이렇게 해서 총 6명으로 영국 항의방문단이 구성되었다.
영국 방문단은 2015년 5월 18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출국 기자회견을 하고, 현지로 떠났다. 출국 기자회견에는 많은 언론사들이 취재를 나왔다. 영국 항의방문 이슈가 국내 언론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출발 조짐이 좋았다.
런던에 마련된 숙소에서 옥시레킷벤키저 본사까지는 차로 한 시간 정도 이동하는 거리였다. 일정은 바로 다음 날부터 시작됐다. 항의방문단은 오전 8시 30분 전에 옥시 본사 앞 정문에 도착했다. 옥시 본사는 현관문을 굳게 닫아 놓았다. 항의방문단은 본사 현관 앞 도로변 인도에 자리를 잡고 항의시위를 했다. 옥시 본사 경비가 상황을 주시했다.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첫날 항의시위 때는 옥시 본사는 무반응이었다. 둘째 날에 옥시 본사 관계자가 나와서 일행들과 미팅을 가졌다. 대외홍보를 담당하는 현지 임원으로 기억하고 있다.(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옥시 본사는 피해자들이 영국 현지까지 항의행동을 왔으니 당황했을 것이다. 반대로, 특별히 위협을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당시 상황에서는 옥시 본사가 이 참사의 리스크가 어느 수준에서 '관리'되고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정부와 국회의 피해 문제 해결이 지지부진했고, 대중의 관심과 여론이 시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항의방문단은 이 문제를 이슈화해서 국내외에 알려야 할 입장이었다. 본사가 무슨 태도를 취하던 처음부터 계획한 대로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항의방문단은 출근길 옥시 본사 항의 방문과 오전 시위를 마치면, 오후에는 런던 시내로 이동했다. 런던 시계탑 앞 광장에서 참사를 알리는 펼침막을 펼치고 피해자 유품을 전시하면서 거리 캠페인을 전개했다. 영국 유력 언론 중 하나인 '가디언지'가 우리 이슈를 취재해 보도했다. 딸의 사진도 보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의방문 활동 소식은 영국 현지 언론보다는 오히려 국내에서 더욱 뉴스가 되었다.
영국 항의방문 행동이 얼마만큼 성과를 냈는지는 잘 모르겠다. 현지에서 열심히 활동했으므로 소기의 성과를 냈다고 믿는다. 가디언지와 같은 현지 언론에 소개되었으므로 어느 정도의 여론 조성의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옥시 주주들과 본사에 대한 압박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주주들에게 해당 이슈를 알리는 것은 회사나 주주에 대한 평판,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 될 수 있으므로 문제해결에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사실, 영국 항의방문은 어렵게 추진된 일정이었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작은 단체이며 운영에 있어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외부 지원에 의존하지 않았고 독립적으로 운영해 가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피해자 모임도 자생력을 갖춘 경우가 아니었다. 영국 항의행동이 아무리 필요하고 좋은 기획이라고 해도 예산이 없으면 일은 실현될 수 없었다.
2015년 영국 항의행동이 가능했던 것은 최예용 소장의 추진력과 이를 믿고 응원해 준 환경보건시민센터 운영진 등 내부적인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피해자 모임도 자체 여력은 적었지만 십시일반 피해자 가족들이 힘을 보태 어느 정도 경비를 마련했다. 그럼에도 많은 부분 경비는 환경보건시민센터에 의존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항의행동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사무실 이전을 위해 모아둔 목돈을 당겨 사용했다. 영국 항의행동은 경비 마련도 어려웠고, 현지에서 문제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사안이었다. 그러나 돌파해 냈다.
당시 가습기살균제참사는 대중들로부터 서서히 잊어지고 있는 이슈였다. 영국 항의행동은 그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다시 점화시켰다. 이미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대중들에게 '그게 아니었네!' 하는 여론을 환기시켰다. '피해자들이 영국까지 가야 하는 거였어! 어린아이도 가야만 했던 거야!' 하는 문제의식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이 참사에 대한 기억들이 다시 ‘소환’되었다.
2015년 후반 검찰 내부에서 다시 어떤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2016년 본격적인 검찰 수사가 진행됐다. 2015년 영국 항의행동이 2016년 검찰의 본격적인 수사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면, 과도한 해석일까? 적어도 그러한 이유 중 하나는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기억의 소환은 곧 여론이고, 여론은 곧 문제해결에 대한 압박이기 때문이다.
영국항의 방문 당시 딸은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딸과 영국에 동행하는 것에 대해 아이 엄마와 의논해서 먼저 동의를 구했다. 딸에게는 “아빠랑 비행기 타고 영국 여행 가지 않을래?” 하며 꼬드겼다. 사실 출국할 때까지만 해도 영국 현지 일정이 그렇게까지 고되고 힘들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현지 일정을 꼼꼼하게 챙겨보지 않았다. 일정에 맞춰 움직이면 된다고만 생각했다.(이 허술함이란!)
결과적으로 아이에게는 매우 미안한 일정이 되어 버렸다. 항의방문단은 런던 시내 숙소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고 옥시 본사로 한 시간 정도 이동해서 출근하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소위 ‘출근투쟁’을 했다. 사실상 새벽부터 채비하고 움직였다. 옥시 본사 앞에서 오전 내내 항의행동을 한 후, 다시 한 시간을 이동해 런던 시내로 와서 오후 캠페인을 진행했다. 저녁에는 런던 트라팔가광장 등에서 야간 거리 캠페인을 진행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강행군하는 일정이었다.
참사 이슈의 무거움과 어렵게 나선 일정인 점을 감안한다면 항의 방문단의 강행군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 입장에서는 쉬운 일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는 묵묵히 따라 주었고 견뎌주었다. 아빠로서,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미안했고, 한편 고맙고 자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