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인’ 취급을 당하다.

첫 피해자 추모대회와 당시 정부의 ‘모르쇠’

by 걷는파랑새

네 차례 기자회견을 진행하면서 피해 문의와 접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개인 핸드폰 번호를 공개했기에 개인적 문의도 많았다. 피해자모임 인터넷 카페를 통한 문의도 이어졌다. 피해자 모임의 경우 피해 접수와 문의에 대응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했다. 가능한 환경보건시민센터로 피해접수를 연결했다.


지난 11월 11일 보건복지부 항의 행동과 광화문사거리 기자회견을 통해 항의행동의 반경도 넓어지고 있었다. 드디어, 피해자들의 첫 ‘집단적’ 항의행동을 준비했다. 2011년 11월 30일 정동 프란체스코홀 강당에서 ‘제1회 가습기살균제피해자 추모대회’를 진행했다. 9월에 항의행동을 시작한 이후 피해자와 가족들이 한 곳에 모인 첫 행사였다.


이날 피해자대회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간이었다. 피해가족들을 위로하고 정부에 대책을 촉구하는 자리였다. 사망한 며느리의 사진을 안고 있는 시아버지의 모습은 안타깝고 비통했다. 피해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의 춤은 숙연했다. 죽어 간 아이들과 산모들을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해 행사장 곳곳에 놓아둔 소장품들은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피해자대회에 참석한 피해자와 가족들은 그동안 전화와 온라인 카페를 통해 만나왔던 이들이었다. 첫 만남이었으므로 궁금했고 반가웠던 이들이었지만, 비통함으로 인사를 나누는 것도 힘들었다. 그저 슬픔을 안고서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규탄하며, 추모하는 첫 피해자대회였다.




추모제 행사를 마치고 참석자들은 정동에서 광화문 사거리로 이동했다. 더 깊은 겨울로 가는 쌀쌀한 날씨였다. 광화문사거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서 피해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는 정부와 기업에 대해 항의했다. 이어 정부와 기업의 사과와 피해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항의서한을 들고 세종로 정부종합청사까지 행진했다. 청사 후문으로 가서 목청 높여 구호를 외쳤다.


항의서한을 전달하고자 했지만 정부 관계자들은 누구도 나와 보지 않았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참사에 대해 문제해결을 촉구하는 항의서한이었지만, 한 낱 ‘민원서류’로 치부되었고 초라하게 ‘문서접수’로 처리되었다.

그날 민원접수로 처리된 해당 서한에 대한 회신은 지금까지도 없다.


피해자들이 왔는데도 내다보지도 않았으며, 회신도 없는 그날의 풍경은, 당시 정부(이명박 정부 2008.2.25.-2013.2.24.)의 입장이었고 태도였다. 피해자들이 첫 피해자 추모대회를 갖고 정부의 공식입장을 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을 ‘홀대’했다.


정권 말기,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해서는 대응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바로 이어질 대통령 선거에서 악재로 작용할 수도 있다며 조심해야 한다고 정치적으로 판단했을 것 같다. 나쁜 정치는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모르쇠’할 수 있다. 당시 내부 상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2011년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그해 아이는 다섯 살이었다. 누구도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살면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모른다. 꽃길만 걷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같은 마음이다. 누구나 고통은 피하고 싶다. 꽃길은 그런 염원과 불안이 담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1년은 정말로 예상 밖이었다.


지금도 2011년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어떤 미완의 숙제와도 같다. 이 글을 써나가다 보면 조금은 정리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