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넘어 깨달음에 이르는 길

도마복음의 신앙

by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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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urorey, 출처 Unsplash


이신칭의(以信稱義), 개신교의 핵심교리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이지요.

기독교, 특히 개신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 한가지를 뽑으라면 단연, '믿음'의 신앙일 것입니다.


사실 '이신칭의'는 믿음을 강조하기 보단, 은혜를 강조한 신앙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행위를 해도, 아무리 최선을 다해 믿어도,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역사가 길면 처음 의도가 왜곡되는 법이지요.

개신교에서는 '믿음'이 참으로 중요해졌습니다.

'믿음'이 강조되는 공동체에서 '질문'은 반항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그 오랜 세월동안 가룟 유다와 도마가 폄훼되어 왔겠지요.

그들은 질문했던 자들입니다.


유다

'왜 그것(향유)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아깝게 발에 부어버리는 것입니까?'


도마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요즘 저는 도마복음 해설서를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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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도 적었듯, 도마복음은 "깨달음"의 복음입니다.

비교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에 의하면, 깨달음은 신비주의와 같다고 하더군요.

신비주의란 영적인 세계에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라,

매 순간, 나를 둘러 싼 표면적인 현실 세계의 이면을 보는 일이라고 합니다.

즉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보는 일이지요.



깨달음만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자칫 영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영지주의란 영과 육 이원론 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깨달음(그노시스)을 통해 육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는 사상입니다. 깨달음을 강조하는 신앙은 육체적인 것을 경시할 위험이 있지요.

그런데 도마복음 해설서를 읽다보면, 지금 시대의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복음서라는 생각이 듭니다.



'믿음'이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인간이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구원은 '은혜'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열심히 교회를 다니며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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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pianarosa, 출처 Unsplash



그러나 도마복음은 말합니다.

'네 안에 있는 하느님을 깨달으라'고.

도마복음에 의하면, 우리의 신앙은 최선을 다해 내 안에 있는 하느님,

참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이며, 거듭남입니다.



나 자신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외부에서만 하느님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자칫 자기 중심적인 신앙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밖에 계시다'고요.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을 발견하면, 내 옆에 있는 하느님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시듯, 내 곁에 있는 이 사람에게도 하느님이 계시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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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schievous_penguins, 출처 Unsplash



내면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다보면, 우린 태초의 빛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태초의 하느님이며, 태초부터 있었던 '참 나'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뿌리를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모든 생명은 하나라는 진리에 이르게 됩니다.

너와 내가 하나의 뿌리를 가진 연결된 존재인 것이지요.

그러러면, 세상의 아픔이 결코 나와 무관한 것일 수 없습니다.

내 이웃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내 이웃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일요일, 세월호 9주기였습니다.

기억식에서 동생에게 쓴 편지를 낭독하던 형의 편지가 잊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원래 아프고 불편한 일은 피하려고 한다.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착하고 여려서 그런 것 같다.

똑바로 쳐다보기 너무 힘들기 때문에

금방 어쩔 수 없는 일이자 이례적인 일이라고 넘기려고 한다.

그래도 형은 조금 알아줬으면 한다.

이례적인 일이 언제나 이례적인 일은 아니라는 걸.

슬픔을 강요하는게 아니라는 걸.

너희의 죽음만 특별하게 강요하려는 게 아니라

모든 죽음이 위로 받을 일이고 모든 생명이 귀하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는 걸.

- 영만이의 형이, 영만이에게 쓴 편지 중




특히 마지막 문장이 오래도록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너희의 죽음만 특별하게 강요하는게 아니라,

모든 죽음이 위로 받을 일이고 모든 생명이 귀하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는 걸'




'이제 그만 하자'

'너희의 죽음만 특별한게 아닌데 왜 난리냐'

온갖 날선 말들이 많이 오고 갔지요.




그러나 형의 말처럼,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만이 특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죽음이 위로 받아야 하고, 모든 생명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현장을 우리 모두가 봤고,

왜 이들이 죽어가야 했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9년이 지나는 동안 제대로 답변을 못 들었기 때문에 계속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도마복음에 의하면 우리는 연결된 존재들입니다.

결국 같은 뿌리를 가진 존재들이지요.

타인의 고통과 죽음이 결코 나와 무관할 수 없습니다.

도마복음을 읽다가 그 지점에 다다르자 고통스러웠습니다.

가급적 피하고 싶단 생각도 들더군요.

사람들이 회피하려는건,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착하고 여리기 때문이라는 형의 편지가 제 마음을 위로합니다.




대 전제를 두고 무조건 믿으라는 신앙은 점점 설 자리가 없다는 걸 느낍니다.

내 생각과, 선택이 중요한 요즘 시대에는 더욱이 그렇지요.

그래서 저는 도마복음의 신앙이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하단 생각이 듭니다.

오랜 세월 폄훼되어 온 도마의 위치를 끌어 올려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느리고 더디더라도, 어렵더라도, 좁은 길이더라도(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기억해봅니다) 가야할 것 같습니다.

스스로 서기 위해서는 더더욱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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